드래곤 에이지/기타

세 그루 나무가 자정에 이르기까지

taamro 2022. 6. 12. 21:27

Three Trees to Midnight

Patrick Weekes


 벤투스의 뮈리온은 쿠나리에 관해 별달리 아는 바가 없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쿠나리는 단지 성가신 존재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그들을 상대하는 건 햇병아리 병사들의 몫이었고, 모두는 그저 불평을 곱씹으며 제국 방어 세금을 낼 따름이었다. 하나 그 태평스러운 무지함은 화포의 폭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제국의 보석 벤투스는 함락되었다.

 쿠나리는 갑옷을 입은 자는 누구도 가리지 않고 베어넘겼다. 무장하지 않은 이들은 여러 무리로 나뉘어 분류되었다. 여자와 아이들, 노인은 신속히 가정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은 연금술 화합물을 억지로 주입당해 정신을 독살당할 제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곧 그들은 한때 걸치고 다니던 금실 자수가 수놓인 아름다운 로브를 질질 끌고 다니며, 빈 껍질만 남아 차마 보기 힘든 공허한 눈빛을 띤 채로 거리를 청소하는 신세가 되었다.

 남자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노역장에 투입되었다.

 쿠나리 함선에 며칠째 구류된 동안 맞는 오후의 햇볕은 따가웠다. 뮈리온은 눈을 찌푸렸다. 죄수들 사이로 발을 질질 끌며 돌아다닐 때마다 다리에 매인 사슬이 짤강였다. 곧 눈앞의 풍경이 모래사장에서 풀밭으로, 그 직후 숲으로 바뀌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한 모양새의 뒤틀린 초록빛 나무둥치 사이로 암록색 나뭇잎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뮈리온은 투덜거렸다. "비샨티 카파스." 빌어먹을 놈들의 쿠나리가 죄수들을 알라산 숲 외곽에 데려온 것이었다.

 막 마지막 죄수가 배에서 내린 참이었다. 웃옷을 입지 않은 쿠나리들이 준마 한 마리를 통째로 손쉽게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검을 휘두르며 이들에게 호통을 질러 줄을 세웠다. 마침내 다른 쿠나리보다도 키가 더 큰 쿠나리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뒤틀린 얼굴을 하고, 돌출된 뾰족한 가시를 휘감아 매듭지은 밧줄로 이루어진 방어구를 입은 사내였다. 그 회색 피부에는 금색과 붉은색의 줄이 덧칠되어 있었다. 그 뿔은 들쭉날쭉했고, 투구를 푹 눌러쓴 모양으로 얼굴 양 쪽에 뻗어 있었다. 뿔 하나가 잘려나간 자리에는 강철 장식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아마도 전투에서 동강이 났었던 것이리라.

 "바스!" 장대한 쿠나리가 외쳤다. 그 굵고 낮은 목소리에 뮈리온의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듯했다. "너희는 바스다. 한낱 사물에 불과한 것이다. 너희는 만물의 사리를 모른다. 너희는 쿤의 인도를 따라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참 마음이 넓기도 하시지." 뮈리온의 앞에 선 죄수가 중얼거렸다. 억양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남부에서 온 듯한 키가 큰 남자였다. 뮈리온은 고개를 숙였다. 쿠나리가 말대꾸를 한 작자를 추려낼 작정이라면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바스타아르, 곧 바스의 사육자다." 쿠나리 지도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 생사는 이제 내게 달렸다. 일하면 살아남을 것이고, 저항하면 죽을 것이다. 달아나면―" 쿠나리가 아주 천천히 웃음을 띠었다. "달아나면 너희는 사냥지배자가 처분할 것이다." 쿠나리 지도자는 손짓으로 다른 쿠나리 전사를 가리켰다. 가죽 조각과 새끼용 비늘을 빳빳한 붉은 밧줄로 엮은, 보다 가벼운 차림새를 한 자였다. 이자의 얼굴에는 흑백의 물감이 덧칠되어 있었다. 사냥지배자가 차가운 눈길로 죄수들을 훑는 사이 바스타아르는 말을 이어나갔다. "달아나면, 이자가 너희를 쫓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고통을 받게 될 거다. 벤투스의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뮈리온은 공황감이 몸 깊은 곳에서 움트는 것을 느끼고 있는 힘껏 자신을 억눌렀다. 마음을 비우고 몸을 가만히 두려고 애썼다. 겨우 정신을 잃지 않고 위를 쳐다볼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쯤, 바스타아르는 자신을 지나쳐간 뒤였다.

 "각자 도끼를 집어라. 너희는 나무 베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유용하고 유순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언젠가는 쿤에서 너희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스타아르는 줄지어 선 죄수들을 한번 흘겨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이리 와라."

 뮈리온은 불안한 눈길로 사냥지배자가 있던 쪽을 한 차례 쳐다보았다. 하지만 쿠나리 추적자는 이미 함선으로 돌아간 뒤였다. 쿠나리 경비병들이 2인 1조로 커다란 상자를 옮겨다 모래사장에 떨어뜨려 놓았다. 뮈리온이 가까이 다가서 보니 상자 안에는 벌목용 도끼가 가득했다. 육중하고 조잡했다. 나무를 벨 수 있을 만큼은 날카롭지만, 싸움에 쓰기에는 지나치게 만듦새가 엉성했다.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뮈리온은 도끼 하나를 집어 들었고, 곧 기나긴 죄수의 행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죄수들은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행렬에서 풀려나기 전, 죄수들은 한 쌍씩 짝지어져 서로 발목에 사슬이 얽매이게 되었다. 사슬의 길이는 고작 뮈리온의 팔뚝 정도에 불과했다. 서커스에서 기예를 펼치는 공연자가 아닌 이상은, 이런 식으로 얽매인 채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뮈리온이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뮈리온과 그 앞에 서 있던 죄수의 차례가 되었다. 뮈리온의 짝이 될 죄수가 앞으로 나섰다. 노동자들이 주로 입는 갈색 튜닉을 걸친, 등이 곧고 어깨가 다부진 자였다. 머리칼이 은빛을 띠는 것으로 보아 중년을 넘긴 나이인 듯했다.

 "좋아." 그 죄수는 굳은살이 박인 손을 도끼 상자 옆의 경비병에게 내밀며 말했다. "일을 해보자고, 그럼."

 그러고 죄수가 돌아설 때, 뮈리온은 그 남자의 귀가 뾰족한 것을 알아차렸다.

 엘프로군. 그렇다면 다 납득이 돼. 쿠나리가 엘프에게 도끼를 건네는 사이 뮈리온의 입이 조소로 실룩거렸다. 벤투스의 엘프라면 분명 노예였을 테고, 당연히 제국에 대한 충성심도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국이 이 오랜 세월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켰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을 터였다. 아마도 병사들이 쓰러지고 마법사들이 독극물을 삼킬 때 웃음을 터뜨렸겠지. 그리고는 새 주인을 기껍게 섬기려 들 것이다.

 "더러운 뾰족귀 같으니." 뮈리온은 엘프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엘프와 쿠나리 경비병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그 말이 자기 입에서 저절로 새 나온 줄도 모르는 채로.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엘프 쪽이었다. "게을러 터진 솀이 허드렛일에는 익숙지 않은 모양이군." 엘프는 알랑거리는 웃음을 띠고 말했다. "손이 참 곱고 예쁘기도 하지. 날 다른 엘프와 엮어 주시오. 이 불쌍한 작자가 수치를 면할 수 있도록."

 "수치는 네 그 뾰족귀다운 멍청함 때문에 느끼겠지," 뮈리온은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러고는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뒤를 찌를 심산 아니더냐?"

 "조용히 해라." 경비병이 큰 소리를 냈다. "소란을 피우지 마라." 경비병은 천천히 말했다. 뮈리온은 대부분의 쿠나리가 공용어를 그리 유창하게 하지 못한다는 걸 떠올렸다.

 "그럼 날 사람과 묶어 주시오, 이 뾰족귀가 아니라." 뮈리온이 은발의 엘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는 편이 모두에게 빠를 거요." 엘프가 말을 보탰다. "벤투스의 인간이란 추접스러운 족속이라, 자기네 욕심 말고는 무엇도 신경 쓰지 않으니."

 경비병은 잠시 주저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곧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세 사람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안 된다." 세 사람 모두가 몸을 돌리자 바스타아르가 다른 죄수 행렬로부터 이쪽으로 위압적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해안에 다른 죄수선이 여럿 정박했던 것이다. 바스타아르는 경비병을 노려보았고, 경비병은 움츠러들었다. 바스타아르는 뮈리온과 엘프 쪽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스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더는 엘프나 인간이라는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바스가 있을 뿐이다. 바스는 쿤을 받들 수 있다는 가치를 입증해 보여야 한다." 바스타아르는 경비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자 둘을 함께 묶어라. 하나되어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하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바스타아르." 경비병이 낮은 소리로 읊조렸다. 그러고는 사슬을 꺼내서는 족갑 하나를 엘프의 발목에 단단히 채웠다. 곧 경비병은 뮈리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력해진 뮈리온은 앞으로 나섰다. 곧 뮈리온의 오른다리에 차가운 족갑이 채워졌다. 짤각 하고 족갑이 닫힐 제 뮈리온의 부드러운 살갗이 집히는 게 느껴졌다.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바스타아드[각주:1]." 엘프가 순종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몸집이 커다란 쿠나리는 엘프를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른 죄수 행렬에 명령을 내리기 위해 물러났다.

 경비병이 죄수 행렬에서 자신을 풀어주고 벌목용 도끼를 거칠게 쥐어줄 제, 뮈리온은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뮈리온은 엘프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우리 모두 죽을 뻔했다."

 "뭐라고 했나, 솀?" 엘프가 되물었다.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이 뾰족귀도 예전만큼 예리하지 않아서 말이다. 종종 헛것을 듣고는 하지."

 "이제 가서 나무를 잘라라." 경비병이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죄수들은 이미 짝을 이뤄 녹림을 벌채하는 중이었다. "분주히 일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엘프는 앞으로 나섰다. 사슬이 발목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뮈리온은 발을 헛디뎠다. 엘프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서 와라, 솀." 엘프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방해가 되지 않게 애라도 써 보지 그러느냐."

 뮈리온과 엘프는 몇 걸음 뒤에 어색하게나마 사슬로 엮인 두 다리가 하나되어 움직일 수 있도록 리듬을 맞출 수 있었다. 뮈리온의 다리가 엘프의 다리보다 긴 탓에 뮈리온은 잰걸음을 해야 했다.

 "계속 그따위 식으로 입을 놀리다간 죽을 거다." 뮈리온이 말했다. 두 사람은 풀밭을 가로질러 가는 중이었다. 발에 매인 사슬이 새된 소리를 냈다. "넌 여전히 노예다, 이 멍청한 놈. 단지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을 죽이는 짐승 놈들을 섬기게 되었다뿐이지."

 "네가 뭘 안다고 그따위 소리를 하지?" 엘프가 되물었다. 엘프의 목소리는 더는 친근하지 않았다. 뮈리온은 엘프가 숲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일꾼이 아니야, 무슨 튜닉을 입었든지간에 말이다."

 뮈리온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도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구나, 엘프."

 "스트라이프다." 엘프가 말했다.

 "뭐라고?"

 "여기엔 엘프가 나 혼자만 있는게 아니잖느냐. 부를 테면 스트라이프라고 불러라.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마 내가 너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자기를 스트라이프라고 칭한 엘프는 여전히 뮈리온 쪽을 바라보는 대신, 눈을 찌푸린 채 저 앞의 나무를 보고 있었다. "헐렁한 튜닉 덕분에 뱃살은 가렸는지도 모르지만, 그 둥글둥글한 팔뚝을 보아하니 배불리 먹는 데는 지장이 없었던 모양이군. 그리고 네가 고개를 숙이는 건 두려움 때문이다, 습관이 아니라."

 뮈리온은 두 손을 소매 속으로 홱 돌려 넣었다. "적어도 나는 고개를 숙일 줄 알기는 하지." 풀밭의 잡초가 허리께까지 높이 자라는 지점에서 두 사람은 멈춰섰다. 다른 죄수들은 이미 나무를 베기 시작한 참이었다. 조잡한 도끼를 어색한 솜씨로 휘두르는 소리가 공기중에 울려퍼졌다. "어느 뾰족귀 놈이 멍청하게 대놓고 경비병의 대장을 후레자식이라고 부르는 거냐?"

 "경비병 대장이 공용어를 얼마나 잘 알아듣는지 보려고 그런 거다." 스트라이프는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알게 됐지. 우리와 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미묘한 뉘앙스를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라는 걸."

 "노예 주제에 무슨 뉘앙스를 운운한단 말이냐?" 뮈리온이 쏘아붙였다.

 스트라이프는 가까이 있는 나무로 다가섰다. 둥치가 워낙 굵어 뮈리온의 두 팔을 다 벌려도 한 품에 들어오지 못할 크기의 못생긴 나무였다. "경비병이 지켜보고 있다, 솀. 슬슬 나뭇일을 시작하는 게 어때." 스트라이프는 나무 가까이 다가가서 도끼를 휘둘러 날을 나무에 박아넣었다.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뮈리온이다, 엘프. 여기엔 솀이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 뮈리온은 몸을 일으키고서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벨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은 도끼를 들어올려 휘둘러보기로 했다.

 도끼날을 내려치는 각도가 엉성했던지, 그 충격에 뾰족한 가시 같은 나뭇조각이 흩뿌려져 뮈리온의 팔에 부대꼈다. 뮈리온은 도끼를 떨어뜨리고는 움찔했다. 도끼가 부드러운 잔디밭에 떨어지자 스트라이프는 대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살면서 육체노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작자인가 보군! 전에는 무슨 일을 하고 살았지, 뮈리온? 쿠나리에게서 숨으려고 그 노동자 튜닉을 걸치기 전에 말이다. 상인? 하급 귀족? 아니면 마법―"

 뮈리온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서 스트라이프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엘프는 휘청거리며 물러섰고, 곧 웃음을 거둔 채 성이 나서 붉은 얼굴을 내보였다. "입 닥쳐라, 빌어먹을 뾰족귀!"

 하지만 스트라이프는 곧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도끼를 풀밭에 내려놓은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어디 그렇게 만들어 보지 그러나, 솀?"

 뮈리온은 한 번 더 주먹을 날렸지만, 이번엔 엘프가 공격을 팔로 막아냈다. 마치 두꺼운 밧줄에 주먹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뮈리온의 주먹에 아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뮈리온은 몸을 물리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발목에 매인 사슬이 너무 짧았다. 뮈리온은 비틀거렸고, 거의 넘어질 뻔했다.

 순식간에 눈앞이 반짝 하는 듯하더니 곧 고통이 피어올랐다. 뮈리온이 예상치 못한 일격에 주춤거릴 제 다시 한 번 얼굴에 주먹질이 꽂혔다. 멀지 않은 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스트라이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뮈리온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뮈리온은 급하게 호흡을 토하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정말 테빈터인 답군그래, 아닌가?" 스트라이프가 뮈리온 곁에 선 채로 물었다. 시야 한 켠에는 바스타아르가 쿠나리 경비병을 대동하고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제 손으로 끝내지도 못할 싸움을 시작하는 게 말이다. 마법사와 노예, 혈마법을 앗아가면 그저 물러터졌을 뿐이지."

 쿠나리 경비병은 검을 뽑아들고자 했으나 바스타아르가 경비병의 손을 가로막았다. 바스타아르는 뮈리온을 내려다보고는 웃음지은 뒤,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제 일어나서 일을 하시지." 스트라이프가 뮈리온 쪽으로 몸을 가까이 하며 낮게 읊조렸다.

 뮈리온은 잽싸게 몸을 일으켜 무방비 상태의 엘프에게 박치기를 날렸다. 배를 맞은 스트라이프가 비틀거리는 때를 놓치지 않고 뮈리온은 엘프를 여러 차례 두들겨팼다. "그 따위로 지껄이는 걸 보아하니 넌 노예가 아니구나." 뮈리온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곧 양손을 깍지 끼고 내리쳐 스트라이프의 머리통을 박살낼 참이었다. "네 정체가 뭐든 간에, 너는 정체를 숨기고 있다. 경비병한테 알리는 순간 너는―"

 스트라이프의 밧줄처럼 탄탄한 근육질의 팔뚝이 뮈리온의 주먹을 흘렸다. 곧 스트라이프는 뮈리온의 가슴뼈 바로 아래에 주먹을 꽂았다. 일순간 숨이 막혔다. 뮈리온이 휘청이자, 스트라이프는 뮈리온의 어깨를 붙들고 뮈리온을 억눌렀다.

 "이런데도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듣다니." 스트라이프는 말했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가 다른 한 손으로 주먹질을 하리란 걸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곧 세상이 반짝 하는 듯하더니 모든 게 어둠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정신이 흐릿해지는 사이, 뮈리온은 쿠나리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 뒤로 쿠나리 경비병들이 당연하게도 스트라이프를 두들겨팼지만, 그건 단지 형식적인 체벌에 불과했다. 이 뒤로 더 말대꾸를 하거나 사고를 치면 더한 걸 맛보여주겠다는 경고일 뿐이었다. 나중에 경비병들은 스트라이프와 의식을 잃은 뮈리온을 함께 질질 끌고 가 죄수들이 밤을 보내는 임시 숙소에 던져넣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사슬에 매여 한 무더기가 된 채였다.

 간수들이 고소한 냄새가 나는 죽 비슷한 음식을 담은 그릇을 들고 돌아왔고, 스트라이프는 얼른 그것을 허겁지겁 자기 입에 집어넣었다. 그 옆에서 마침내 잠에서 깬 뮈리온은 코를 킁킁거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고상한 입맛에는 영 맞지 않는 모양이지?" 스트라이프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입 닥쳐라." 뮈리온은 스트라이프를 한 번 노려본 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입에 너무 많은 양을 욱여넣은 탓에 뮈리온은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지. 양껏 먹어 둬라. 하루종일 일해야 하니까."

 임시 숙소는 한쪽이 개방되어 있었다. 산들바람이 그 사이로 불어와 죄수들의 몸을 식혀 주었다. 스트라이프는 먼 숲이 잘 보이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끼 낀 줄기와 묵직한 잎사귀가 희미한 회색 별빛에 검게 물들었다.

 뮈리온이 죽을 한참 먹고 있을 때, 파리하고 희끄무레한 형체가 숲에서 돋보였다. 할라였다. 테빈터제 사브르처럼 굽은 뿔이 돋은 녀석이었다. 주변의 냄새를 맡고 경계한 모양인지 앞다리 하나를 들고 있었다. 스트라이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할라는 천천히 땅에 발을 세 번 굴렀다.

 스트라이프가 고개를 젓고 발을 두 번 굴렀다.

 할라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언제 거기 있었냐는 듯이 재빠르게 숲으로 되돌아갔다.

 "방금 뭐였지?"

 스트라이프는 뮈리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뜬 채였다. "뭐가 뭐란 말이냐?"

 "방금 그 사슴 말이다. 꼭 너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만."

 "실없는 소리를 하기는." 스트라이프가 웃음지은 채 주먹에 우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냥 사슴일 뿐이다. 난 저리 가라고 쫓아버린 거지. 사냥당해 죽에 들어가는 고기 신세가 되는 걸 면하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 저 흰색 녀석들은 분명…" 뮈리온은 생각했다. "할라라고 하는 거였다. 데일스 엘프가 수레를 끄는 데 쓰는 동물이야."

 "그런가?" 스트라이프는 다시금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형제들이 맛있는 부분을 골라먹고 남은 미지근한 스튜라고 생각하면 그랬다.

 "너도 알지 않느냐." 뮈리온이 스트라이프를 쏘아보았다. "너도 그 족속이냐? 데일스 엘프 도적떼 말이다."

 "나 같으면 말이다," 스트라이프가 그릇을 내려놓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나 같으면 데일스 엘프와 사슬로 한데 묶인 이상 말을 조심할 거다. 데일스 엘프는 눈만 잘못 마주쳐도 어느 솀이든 가리지 않고 죽이려 드니까. 여기 데일스 엘프가 정말 은밀히 숨어 있다면, 까딱 잘못했다간 그리될 테지."

 뮈리온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간수가 그들 앞에 멈추자 죄책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릇." 간수가 말했다. 흉터 자국과 생채기가 온몸에 가득한 쿠나리 전사였다. "지금 내놔라."

 뮈리온은 스트라이프를 쳐다보았다. 스트라이프는 눈썹 한 쪽을 치켜들고는 뮈리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먹을 쥐었다.

 뮈리온은 간수에게 그릇을 건넸다. "저녁 식사 고맙습니다."

 스트라이프도 똑같이 했다. 단지 웃음을 가리려 고개를 숙였을 뿐.

 간수가 다음 죄수의 그릇을 챙기려 물러나자 스트라이프는 뮈리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녁 식사 고맙습니다?' 네 영지에서 일하던 노예들은 그렇게 말해버릇했나 보지?"

 "그게 아니라―" 뮈리온은 말을 멈추고 인상을 찡그렸다. "한 번만 더 날 위협하면, 딱히 고운 말을 듣지 못하게 될 게다."

 "걱정하지 마라." 스트라이프는 팔을 베게삼아 짚더미 위에 몸을 뉘였다. "내일이면 나는 여길 떠날 테고, 너도 다른 죄수 녀석과 짝이 될 테니."

 "그렇단 말이지?" 뮈리온은 물었다. 스트라이프가 듣기에는 화가 난 건지, 궁금해하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둘 다일는지도 몰랐다.

 "두고보면 알게 될 거다."

 스트라이프는 불편한 잠자리가 익숙하다는 듯 눈을 붙였고 곧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쿠나리는 모두를 일찍 깨웠다. 스트라이프는 몸을 일으켰다. 뮈리온도 그랬지만 이쪽은 견실한 노예답지 못하게 불평과 투정을 내뱉고 있었다. 쿠나리가 벤투스를 점령하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몰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데 익숙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바스타아르와 이야기하게 해 주십쇼." 경비병이 죄수들을 한데 묶은 사슬을 풀 때쯤 스트라이프가 말했다. "나는 다른 일을 해야 마땅합니다."

 경비병은 스트라이프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마치 테빈터 귀족이 개들을 위해 남겨둔 것 같은 고깃뼈 같은, 건장한 쿠나리였다. "너흰 나무를 자른다." 그의 손이 허리에 있는 몽둥이로 천천히 움직였다.

 스트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압니다. 하지만 일단 바스타아르가 내 말을 듣고 나면 내게 다른 일을 맡길 겁니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 옆에서 긴장한 채로 몸을 달싹였다. 지금쯤이면 진작에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를 그 도끼를 들고 손에 물집이나 잡혀 가며 일을 하고 있어야 했다.

 스트라이프도 마찬가지였다. 삼십 년만 젊었더라면, 지금 올려다보는 자가 인간 경비병이었더라면, 경비병의 눈에 띄지 않도록 허겁지겁 물러나야 했을 터였다. 하루를 조용히 보낼 수 있도록.

 비어 보르아산, 스트라이프는 경비병을 주시하면서 생각했다. 데일스 엘프가 그에게 가르친 첫 번째 교훈이었다. 활의 법도. 어린 나무가 쉽게 휘어지듯, 그대도 그래야만 한다. 몸을 굽히는 데서 복원력을 구하라. 유연성에서 힘을 찾아라.

 경비병은 마침내 눈길을 돌렸다. "이리 와라." 간수는 나지막이 말한 뒤 걸어갔다.

 스트라이프는 그를 따라갔다. 뮈리온 또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맞췄다. "뭘 하는 거냐?" 뮈리온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들은 곧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쿠나리 지휘관의 천막에 도달했다.

 "걱정하지 마라. 몇 분만 지나면 신경 쓸 필요 없어질 테니."

 경비병이 들어서자 바스타아르는 들여다보던 서류에서 눈을 뗐다. 스트라이프와 뮈리온을 보자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트라이프는 절로 주먹을 꺾어 뚜둑이는 소리를 내는 광경을 떠올렸다. "바스는 무슨 용무로 왔는가?"

 스트라이프는 몸을 굽혀 절했다. "저는 연금술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른 엘프와 함께 일했지요. 탠티엘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바스타아르는 코웃음을 쳤다. 얼굴에 칠한 금빛 물감에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스타아르는 흥미로운 기색이었다. "우리는 바스의 이름을 모른다."

 "얼굴에 문신이 새겨져 있습니다." 스트라이프는 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뭇가지 형상의 문신입니다. 그자 또한 저와 마찬가지로 연금술 숙련자입니다. 저희 둘이 함께 일하면 나무를 베는 것보다는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아." 바스타아르는 아주 천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바스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놈도 말이 너무 많았지."

 휘어지되 부러지지 말라. 스트라이프는 기억했다. "저를 그자와 함께 일하게 해 주십시오." 스트라이프는 말했다. "그러면 제가 그자를 조용히 만들겠나이다."

 바스타아르는 경비병을 향해 쿠나리 언어로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고는 바스타아르는 다시 스트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 다른 엘프에게 가도록 하라. 그자와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바스타아르의 웃는 입은 예리한 칼처럼 구부러졌다. "쿤은 그러한 요청은 관대히 허하노니."

 스트라이프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바스타아드." 뮈리온은 팔꿈치로 스트라이프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불평투성이 땅딸막한 남자에 불과한 뮈리온은 더는 스트라이프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경비병은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두 사람을 또다른 커다란 천막으로 인도했다. 스트라이프는 다른 죄수들이 도끼질하는 광경을 쳐다보며 경쾌한 발걸음을 딛어나갔다. 둔탁한 도끼질 소리는 마치 작은 북을 두들기는 것 같아서, 파도가 해안에 부딪힐 제 나는 물거품 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듯했다.

 "마음에 안 든다만." 스트라이프 곁에 선 뮈리온이 중얼거렸다. "쿠나리는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꾸는 작자들이 아니다. 수업에서 배운 바가 있어. 놈들은 모든 사람이 특정한 역할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불평을 토로했다고 해서 마음가는 대로 하도록 두는 작자들이 아니야."

 "너도 육체노동 대신 필경사 노릇이나 했으면 하는가 보지?" 스트라이프가 물었다.

 "내 말 들어라, 이 멍청한 뾰족귀 놈아. 넌 지금 화를 자초하는 거란 말이다. 나는 거기 도매금으로 엮이고 싶지 않다고!"

 "몇 분만 참으면 곧 다른 사람과 짝지어질 거다. 그러면 다시는 내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돼." 스트라이프가 말했다.

 몇 분만 참으면, 스트라이프는 탠티엘과 함께할 터였다. 탠티엘은 벤투스 함락 직후 쿠나리의 공격 계획서를 탈취했다고 했었다. 둘은 숲으로 도망쳐, 어느 특별한 할라가 나타나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기다릴 것이었다. 그 뒤로 몇 시간만 더 있으면 스트라이프는 화톳불자리에 앉아 오래된 엘프 노래를 부를 수 있을 터였다. 탠티엘은 높은음에 맞춰 노래하고, 이렐린은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 아직도 억양이 형편없다며 스트라이프를 나무랄 터였다. 세 사람은 함께 쿠나리를 비웃고, 혈마법과 노예를 지니고도 제 몸 하나 지키는 방법조차 익히지 못한 멍청한 테빈터인들을 비웃을 것이었다. 차고 있던 족갑은 화살통에 걸치면 예쁘장한 장식물이 되리라.

 경비병은 천막 입구를 열어젖혔다. 스트라이프와 뮈리온은 그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을 엮은 사슬이 쩔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스트라이프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냄새였다. 뜨거운 잿물과 땀냄새가 섞인 증기에 눈이 익숙해지자, 스트라이프는 그것이 세탁물의 악취라는 것을 깨달았다. 망토를 입은 자들이 더러운 옷가지를 통에 던져넣은 다음 휘젓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이 아니로군. 스트라이프는 눈치챘다. 이자들의 로브는 자신이 입고 있는 죄수복과는 달랐다. 게다가 그 생김새마저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가볍고 늘씬하게 떨어지는 로브를, 또다른 이는 천을 많이 사용해서 지은 풍만한 로브를 입고 있었다. 이들이 멍하니 옷가지를 두들기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성가회 사제들로 착각할 만한 모양새였다.

 "탠티엘은 어디 있습니까?" 스트라이프는 천막 안으로 들어서며 경비병에게 물었다. 이만한 외딴 곳이라면 경비병이 떠난 다음 두 사람이 도망쳐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스트라이프는 매캐한 증기에 눈살을 찌푸린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브를 입지 않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탠트! 너냐?"

 탠티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프는 그쪽으로 다가섰다. 뮈리온은 초조한 듯 엉성한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잠깐만." 뮈리온이 말했다. "잠깐만, 뭔가 이상해…"

 스트라이프는 탠티엘의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웠다.

 탠티엘의 두 눈이 스트라이프의 시선과 마주쳤다. 엘프 격리촌에서 살아가는 고통과 굴욕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엘프의 연청색 눈이. 허나 그 눈은 흐리멍텅하고 멀겋게 변해 있었다. 입을 쩍 벌린 채로, 탠티엘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채로 스트라이프의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이제 한때 스트라이프의 친구였던 자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데일스 엘프 부족원이 성년에 이르렀다는 징표, 발라슬린 문신만이 유일했다.

 "로브 입은 자들." 뮈리온이 화난 어조로 뇌까렸다. "이들은 마법사였어!"

 스트라이프는 몸을 돌려 다른 잡역부를 보았다. 모래를 가로질러 나무 바구니를 끌고 있는 여자였다. 그 눈은 탠티엘의 눈처럼 생기 없이 텅 비어 있었지만, 지저분하고 흠뻑 젖은 그의 옷자락에는 금실 자수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반짝였다.

 쿠나리 놈들이 마법사를 붙잡으면 어떻게 하더라? 스트라이프는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등 뒤에 일격이 날아들었고, 스트라이프는 곧 제 자신을 욕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 바스도 말을 너무 많이 했다." 경비병이 스트라이프 앞에 선 채로 웃음을 지여 보였다. 끈적이는 갈색 액체가 든 병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제는 조용해졌다.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나? 너도 조용해질 거다." 경비병은 육중한 손으로 스트라이프의 어깨에 손을 얹어 억눌렀다. 뮈리온은 물러나려고 했지만 경비병은 그를 뒤로 밀었고, 뮈리온은 코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탠트! 도와 줘!" 스트라이프는 일어서려고 용을 썼지만, 곧 경비병의 주먹에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분명 이빨 몇 개가 덜그덕거리게 되었을 터였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탠티엘은 그저 무감하게 서서 경비병이 스트라이프의 입을 벌려 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쿠나리는 마법사들에게 뭔가를 먹인 거였다. 사람의 정신을 텅 비워 움직이는 시체 꼴로 만드는 일종의 독극물.

 스트라이프는 약물이 담긴 병을 쳐서 바닥에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경비병의 단단히 쥔 손은 너무 억셌다. 또 한 번 스트라이프의 머리에 일격이 강타했다. 스트라이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곧 약병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눌러, 쓴 액체가 그의 입으로 넘쳐 흘렀다.

 그때 천둥 소리가 천막 안을 뒤흔들었다. 스트라이프는 경비병을 뿌리치고 땅바닥에 쓰러진 다음, 캑캑거리고 머리를 저으며 입에 담았던 액체를 토해낸 뒤 겨우 위를 올려다보았다.

 경비병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트라이프 옆에 선 뮈리온은 한 손으로 경비병을 겨냥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번갯자락이 뮈리온의 흔들리는 손가락 사이를 휘감고 있었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정체를 숨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스트라이프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뮈리온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세상이 핑핑 도는 듯했다.

 "이건 네 탓이다!" 뮈리온은 사납게 소리쳤다. 스트라이프는 자신의 숨통에 손아귀가 죄여드는 것을 느꼈다.


 멍청한 뾰족귀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엘프는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나 마찬가지였다. 뮈리온의 손가락이 스트라이프의 목에 파고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같이 시뻘갰다. 뮈리온의 코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셔츠와 모래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뾰족귀 놈이 뭔가 말하려고 들었다. 정확히는, 뮈리온의 손목을 붙들고 말하려고 애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족쇄를 파괴할 수 있나?" 엘프는 헐떡이며 물었다. 뮈리온은 분노로 손에 더 억세게 힘을 주었다.

 "그럴 수 있었더라면 내가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겠나?"

 "그렇다면…" 엘프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도망칠 때 날 끌고 다닐 준비를 하는게 좋겠군그래."

 뮈리온은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뮈리온은 스트라이프를 붙들고 있던 손을 풀었다. 스트라이프는 거꾸러지며 기침을 토해냈다.

 "도망이라니, 무슨 소리지?" 뮈리온이 물었다.

 스트라이프는 기침을 몇 번 더 하고는, 뮈리온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은 아직도 벌게져 있었다. "알라산 숲 경치 구경 어떤가?"

 알라산 숲이 귀기어린 곳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수백 년이 흘러도 씻기지 않은 오래된 엘프 마법에 신음하는, 위험하고 제어할 수 없는 장소였다. 엘프의 수양과 절제가 부족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표, 라고 한때 나이 많은 매지스터가 뮈리온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뮈리온은 어쩐지 슬프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쩌면 알라산 숲이 곧 자유를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뮈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에서 피를 닦아냈다. 마침내 코피는 멈춘 참이었다. "쿠나리를 피해 도망칠 방도가 있단 말인가?"

 스트라이프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여기 멍하니 서 있는 것보다는 더 나은 기회를 선사할 수 있지." 스트라이프는 일어서서 아직도 멍한 눈으로 가만히 서 있는 다른 엘프를 향해 나아갔다. 뮈리온은 그 뒤를 쫓았다. 스트라이프는 엘프의 어깨를 움켜쥐고 외치고 있었다. "탠트. 탠트! 나야!" 스트라이프가 엘프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 좀 차려!"

 "소용없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의 얼굴에 날것의 고통이 서린 것을 보고는 눈을 돌렸다. "쿠나리 약물이다. 카멕이라고 하는 물건이지. 매지스티리움에서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 그렇게나 많은 양을 먹였으니… 제정신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거다." 뮈리온은 카멕에 관한 소논문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오후에 도깨비불 다트 놀이를 하기 전 점심께에 읽고는 했다. 재시카는 고된 여름의 수호물 의식 수행 뒤에 그렇게 마음을 텅 비워버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환영이라고 했었다. 재시카의 햇볕에 살짝 탄 피부에는 윤기가 흘렀다. 팔 부분을 내놓도록 손질된 로브에는 뱀 모양 팔찌가 감겨 조명에 빛나고는 했다.

 세탁 일을 하는 일꾼 중 한 명도 팔을 드러낸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 여자는 뮈리온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뮈리온은 여자의 살갗이 햇볕에 탄 와중에도 손목에만은 하얀 자국이 남은 것을 보았다. 팔찌를 찼을 것만 같은 자리였다. 뮈리온은 여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계획이 있다면, 지금 당장 가야 한다."

 목소리에 담긴 기색이 전해졌는지, 스트라이프는 뮈리온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른 엘프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전에 입고 있던 것과 같은 옷이군. 어쩌면…" 스트라이프는 엘프의 튜닉을 붙들어 찢고는 그 안을 헤쳤다.

 "뭐 하는 거냐?" 뮈리온이 재촉했다. "너도 정신 가닥을 놓은 껍데기 꼴이 되고 싶으냐?"

 "탠티엘은 쿠나리 침공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너희 도시에 잠입했었다. 내게 알리기를 놈들의 계획서를 탈취했다고 했었지." 스트라이프는 탠티엘의 품에서 네모낳게 접힌 작은 종이조각을 꺼냈다. "좋아, 탠트. 내가 대신 전해 주겠어." 스트라이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친구의 머리와 턱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했지? 다시는 제정신을 찾을 수 없다고?"

 "이런 상태가 되었으니 방도가 없지. 유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안식을 줘야지." 스트라이프는 한숨을 쉬고는 탠티엘의 머리를 쥐고 있던 손을 가쁘게 젖혔다. 뮈리온의 귀에도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드루일께서 네 앞길을 인도하시기를, 탠트." 스트라이프가 친구의 시신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스트라이프는 몸을 일으켜세워 뮈리온을 보고 섰다. 안색이 어두웠다.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매지스터."

 "내가 아니었더라면 넌 진작에 세탁 일이나 하고 있었을 거다." 뮈리온이 사납게 맞받아쳤다.

 스트라이프는 무릎을 꿇고 경비병의 시신을 뒤졌다. "열쇠가 없군." 스트라이프는 경비병의 도끼를 쥐려고 했지만, 움찔 하고 놀라더니 그 대신 곤봉을 챙겨들었다. "활이 있었으면 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겠지." 스트라이프는 일어섰다. "좋아. 천막 뒤로 돌아가지."

 두 사람은 발을 끌며 나아갔다. 천막을 향해 나아가는 사이 둘은 금세 일종의 리듬을 맞출 수 있었다. 이제 사슬은 춤추듯 요동치며 두 사람의 발걸음을 잡아챘다. 스트라이프는 천막을 들어올리고는 빨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이 밑으로."

 뮈리온은 몸을 숙이고 들어올린 천 밑으로 발을 내딛었다. 모래사장이었다. 스트라이프는 그 뒤를 따랐다. 시원하고 맑은 공기에 스트라이프는 눈을 깜빡였다. 한쪽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저류가 이는 듯 파도에는 거품이 일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도저히 뚫고 나가기 어려워 보이는 알라산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죄수들이 그 가장자리에서 서툴게 나뭇일을 하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면 되나?" 뮈리온이 물었다.

 "이제 숲으로 가야지." 스트라이프가 말했다. "우리 부족을 만나야 한다." 스트라이프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뮈리온은 엘프의 성큼거리는 걸음에 발을 맞추며 해안에 줄지어 선 작업용 천막을 지나쳐갔다. "그럼 넌 데일스 엘프가 맞군그래."

 "우리 둘 다 숨기고 있는 게 있던 모양이구나, 매지스터." 스트라이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문신을 하지 않았지?" 뮈리온이 물었다. "아까 천막에서 본 네 친구처럼 말이다?"

 스트라이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천막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탠트는 훌륭한 녀석이었다. 쿠나리 놈들한테 저 꼴을 당하면 안 됐어."

 재시카도 마찬가지였다, 고 뮈리온은 혼잣말을 했다. 끝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던 천막 안의 인물을 생각했다. 누구도 자기 정신 안에 갇힌 죄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쿠나리 약물에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꼭 남부에서 마법사들을 안식자로 만들듯 하지 않는가. 저래서는 신속한 죽음조차 누릴 수 없다.

 지팡이를 지니지 않은 채로 마력의 불빛을 정연하게 현세로 끌어당기자니 꽤나 힘이 들었다. 뮈리온은 대학에서 배운 오래된 명상 주문을 읊조리며 마력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었다. 준비가 될 때까지 필멸의 세계와 영의 세계를 갈라놓는 장벽을 갉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땀범벅이 된 뮈리온은 에너지를 통과시키는 문을 열어젖혔다.

 불덩어리가 천막 위를 뒤덮었다. 가죽에 불이 옮겨붙자 검댕이 치솟았다. 쿠나리 지휘관이 있는 천막에서 즉시 경보를 알리는 외침이 들려 왔다. 세탁 천막 안에 있는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으련만, 뮈리온은 그 소리는 듣지 못했다.

 "안드루일 맙소사,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스트라이프가 고함을 질렀다.

 뮈리온이 스트라이프의 눈길을 마주했다. "저 천막 안의 모두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안겨준 거다. 네가 네 친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멍청한 놈!" 스트라이프는 뮈리온의 튜닉자락을 끌어당겨 멱살을 쥐었다. "한 시간 정도는 우리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이제 놈들이 우릴 바짝 쫓아오게 됐지 않느냐!"

 뮈리온은 스트라이프를 밀쳐냈다. "그럼 그자들을 그대로 놔뒀어야 한다는 말인가?"

 "큰 화재를 내는 건 피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스트라이프는 성난 고함을 질렀다. "어서 와라!" 스트라이프는 몸을 돌리고 뛰기 시작했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의 뒤를 따르려고 했지만, 사슬에 매인 상태란 걸 깜빡 잊고 있었다. 곧 뮈리온은 사슬에 발이 걸려 넘어졌고 모래밭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손과 팔뚝이 넘어진 충격으로 저릿했고, 소금기 서린 공기에 눈이 따가웠다. 마법을 사용하면 항상 감각이 예민해지고는 했다. 마치 모든 것이 조금 더 날카로워지기라도 한 듯이.

 "일어나라, 매지스터!" 스트라이프가 뮈리온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뮈리온은 그대로 끌려 몸을 일으켰다.

 "난 매지스터가 아니다, 빌어먹을 뾰족귀 놈아." 뮈리온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뛰기 시작했다.

 "바깥 발부터, 안쪽 발 딛고, 바깥 발, 안쪽 발." 스트라이프가 뮈리온 옆에서 낮게 읊조렸다. "숲으로 향하고 싶으면 얼른 리듬에 맞춰라!"

 뮈리온은 리듬을 찾으려고 애썼다. 달리는 동안 핏줄이 고동치는 소리가 파도 소리보다도 더 크게 귀 안에 울려퍼졌다. 신고 있는 샌들에는 모래가 엉기고, 주변에서는 죄수들과 쿠나리가 한목소리로 경고의 외침을 내질렀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의 발과 자신의 발을 쳐다보면서 계속해서 내달렸다.

 곧 모래사장을 벗어나 까끌까끌한 풀밭에 이르렀다. 뮈리온은 오른쪽, 스트라이프 너머에서 고함 소리를 들었다. 쳐다보니 경비병 중 하나가 두 사람을 쫓아오고 있었다. 두툼한 몸집의 쿠나리로, 쿠나리치고는 키가 작았다. 뿔은 자그마한 용머리 장식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스트라이프는 전에 챙긴 곤봉으로 경비병의 얼굴에 직격타를 날린 다음, 무릎을 걷어차고 뒤통수를 곤봉으로 후려갈겼다.

 스트라이프는 추가타를 날릴 찰나였지만 뮈리온은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을 잇는 사슬이 팽팽해졌다. 뮈리온은 그 김에 곧장 풀밭에 고통스럽게 엎어지고 말았다. 또다시.

 "멍청한 마법사 놈아!" 스트라이프가 색색였다. 이쪽은 뒤로 넘어진 모양이었다. 스트라이프는 사슬을 잡아당겨 뮈리온의 발치로 몸을 굴렸다.

 "멈춘다고 말을 했어야지!" 뮈리온도 마찬가지로 사슬을 잡아당기며 손과 무릎을 짚고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정도는 알아서 눈치챌 줄 알았다! 안쪽 발부터, 가자!" 스트라이프는 홱 달리기 시작했고, 뮈리온은 서투른 몸짓으로 그 곁을 따랐다. 두 사람 사이에 매인 사슬이 풀밭을 가로지르며 새된 소리를 냈고, 나뭇가지에 걸릴 때마다 요동치고는 했다.

 곧 숲이 나타났다. 어둑어둑한 너머로 나무가 성난 듯이, 마치 뮈리온의 접근을 허하지 않겠다는 듯이 드리운 모양새였다. 뮈리온은 발을 걸려 비틀거렸고, 스트라이프가 그 어깨를 붙잡아 숲으로 이끌었다.

 아침 햇살로 밝은 해변에서 갑자기 숲으로 들어서자니, 앞이 깜깜해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공기에는 낙엽과 오래 묵은 흙더미의 악취가 가득했고, 나뭇가지는 엘프를 따라 달리는 뮈리온의 얼굴과 팔을 마구 할퀴었다. 뮈리온의 허파가 불타는 듯했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뿌리에 사슬이 걸리자, 두 사람 모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뮈리온은 주춤거리며 나무를 겨우 붙들었고, 그러다 이끼가 낀 밑둥에 미끄러졌다. 스트라이프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고는 돌아서서 사슬을 잡아당겼다.

 그때 뮈리온의 눈앞에 뭔가가 갑작스레 움직였다. 눈처럼 하얀 사슴이 두 사람 앞의 나무둥치 사이로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아니, 사슴이 아니었다. 할라. 데일스 엘프는 저 짐승을 할라라고 불렀다.

 할라는 가쁜 숨을 내쉬며 사슬에 매인 채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뮈리온을 바라보고는, 곧 스트라이프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내 희미하게 반짝이는 마력의 기운과 함께, 할라는 젊은 여자 엘프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몸피가 마르고, 얼굴이 예쁘다기보다는 눈에 띄는 특징을 갖춘 여자였다. 머리는 짧게 깎고, 이마에 새겨진 데일스 엘프식 문신 사이로 주근깨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모피가 둘러진 탄력 있는 가죽 의상을 걸친 여자의 한 손에는 활과 화살통이 들려 있었다.

 "활을 가져왔어." 여자가 스트라이프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는 매지스터를 달고 왔군."

 "그래, 네 선물이 훨씬 낫다. 네가 이긴 걸로 해." 스트라이프가 사슬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탠트는 어디 있지?" 여자가 손짓하자 두 사람을 잡아챘던 뿌리가 사슬을 놓고 다시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타암이 정신에 영향을 주는 극약을 탠트에게 사용했다." 스트라이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고는 뮈리온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덧댔다.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하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안타암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여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뮈리온은 주변의 공기에 여자의 분노가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매지스터가 아니다." 뮈리온은 말했다. "마법사이기는 하지만. 내 이름은 뮈리온이다."

 "열쇠가 없나?" 여자가 물었다. 뮈리온은 눈을 깜빡이고는, 이내 여자가 족쇄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없어." 스트라이프가 말했다. 네 마법으로도 이건 어쩔 수가 없겠지?"

 엘프 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의 문신 때문에 꼭 노려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노려본 것이었는지도 모르고. "방법이 없어. 대신 매지스터의 발을 잘라버리면 되는데. 그러면 짐덩이를 떼내고 사슬만 신경 쓸 수 있잖아."

 "매지스터가 아니라니까, 이 멍청한 뾰족―" 스트라이프가 뮈리온의 뒤통수를 찰싹 때리자, 뮈리온은 하던 말을 멈췄다.

 "그러면 쓰나, 이렐린." 스트라이프는 미소를 지으며 엘프에게 말했다. "일단은 녀석 다리는 가만 두도록 하자고."

 "너희 흔적을 숨겨줄 수 있는데." 이렐린, 이라고 칭해진 여자가 말했다.

 "안 돼. 지금 당장 가야 한다." 스트라이프가 친구의 튜닉에서 건진 종잇조각을 이렐린에게 건넸다. "쿠나리가 리베인으로 이동하고 있다. 놈들이 상륙하기 전에 부족에게 소식을 전달해야 해."

 이렐린은 뮈리온을 노려보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본 다음 다시 스트라이프에게 눈을 돌렸다. "그쪽에 들른 다음 자정께에 다시 올 수 있어. 그때까지 쿠나리를 따돌릴 수 있겠어?"

 "이 숲에서 말이냐?" 스트라이프가 웃음을 지으며 가까이 있는 나무둥치를 토닥였다. "분명 뮈리온과 나라면 놈들을 뿌리칠 수 있을 거다. 다레스 시랄, 이렐린. 여유가 되면 자물쇠 따개 좀 챙겨오려무나."

 "다레스 시랄." 이렐린은 뮈리온을 쏘아보았다. "난 탠트를 좋아했어. 스트라이프도 좋아하고. 너 때문에 스트라이프가 쿠나리한테 잡히면, 발 하나 자르는 걸로는 안 끝날 줄 알아라."

 잠시나마, 뮈리온은 이렐린을 보고서 대학 시절 전투 마법을 가르치던 나이 많은 여자 마법사를 떠올렸다. 뮈리온의 보호막은 언제나 형편없었고, 뮈리온의 화염구는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받고는 했다. 그 마법사의 얼굴은 쿠나리와의 전투에서 얻은 흉터로 가득했다. 때문에 그자가 뮈리온에게 훈련을 더 하도록 방과 후에 남으라고 명할 때면 그 노려보는 얼굴이 더 사나워 보이기도 했다. 뮈리온은 그 여자를 맹렬히 싫어했다. 어느 날 그 마법사가 분숫가에 앉아 우는 걸 보기 전까지는. 스승은 전투의 최전선에서 왔음을 나타내는 밀랍 인장이 찍힌 편지를 들고 울고 있었다. 그 광경을 봤다고 해서 그 여자가 좋아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뮈리온은 방과 후 훈련에 불평불만을 터뜨리지는 않게 되었다.

 뮈리온은 제 발로 버티고 일어나 섰다. 다리는 떨리고 호흡은 이제야 겨우 진정되었지만, 뮈리온은 엘프 여자의 노려보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이놈이 쿠나리에게 잡혔을 때면 난 이미 죽고 없을 거다. 그러니 네 협박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이제 그만 출발해야 하지 않나? 아니면 계속 여기서 솀을 노려보는 데 시간을 낭비할 건가?"

 과연 이렐린은 솀을 노려보는 데 시간을 조금 더 낭비했다. 그리고 이렐린 주변의 공기는 마력으로 반짝였다. 일순간 후, 이렐린이 서 있던 자리에는 매 한 마리가 대신 공중에 떠 있었다. 매는 빠르게 날갯짓을 하더니 쏜살같이 숲 너머 가지 위로 날아가 사라졌다.

 "잘 풀렸군." 스트라이프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꺼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고, 뮈리온은 두 사람 뒤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을 들었다. "뛸 준비 됐나? 자, 안쪽 발, 바깥 발, 안쪽 발, 바깥 발…"


 안타암이 사냥지배자를 바스타아르 쪽에 파견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벤투스가 함락된 직후였으니. 바스타아르는 애당초 자신에게 사냥지배자가 붙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바스타아르는 바스를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서투르고 게으른 짐승이 되게끔 다루었고, 따라서 누군가 탈주를 시도한다고 해도 너무 약해서 멀리가지 못할 터였다. 사냥지배자는 지령서에 적힌 내용 외에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고, 바스타아르는 이 또한 침공 계획상의 체계가 흔들리는 증거이리라 짐작했다.

 보통 같았으면 다른 쿠나리가 안타암을 지원하기 위해 여기 나섰을 것이다. 일꾼은 장비를 만들고 보급 물자를 관리하며, 타마스란 사제들은 안타암의 정신과 육체가 공히 강건할 수 있도록 해주었을 터였다. 벤하스라스 첩자들은 적 후미를 정찰하는 동시에 훈련받은 바를 저버리고 쿤을 벗어나는 탈영병들을 제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안타암은 다른 쿠나리의 축복을 받지 못한 채로 남부의 바스를 공격했다. 그리고 사소한 일은 평소와는 달리 어긋나고 있었다. 물자 보급은 늦어지고, 함선은 충분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사냥지배자가 선 해변으로 걸어나갈 제, 바스타아르는 다른 쿠나리의 배반에 치를 떨었다. 그자들이 남부의 바스에게 죽음을 안기자는 안타암을 지원했더라면 두 명의 죄수가 탈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바스타아르가 두들겨팰 죄수 또한 나중에 따로 찾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냥지배자는 거의 인간의 키만큼이나 길다란 활과, 사냥지배자 그 자신보다도 더 커다란 창을 지니고 다녔다. 마침 사냥지배자는 지금 시위에 화살을 매긴 참이었다. 바스타아르는 처음에는 사냥지배자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건지 몰랐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해변을 바라보자 비로소 검은 빛깔 갈매기가 죽은 게를 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스타아르가 가까이 가자 사냥지배자는 대궁의 시위를 최대한으로 당겼다. 바스타아르는 보통은 정찰병을 낱잡아보고는 했지만, 저만한 크기의 활을 만궁 상태로 저토록 오래 유지하는 힘은 분명 인상적이라 할 만했다.

 한데… "죽일 건가?" 바스타아르는 사냥지배자의 뒤에 다가서며 제대로 된 쿠나리 언어로 물었다.

 잠시 동안 사냥지배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저것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쿤의 법도는 의미 없는 폭력을 행하라고 하지 않는다."

 "이미 시위에 화살을 매겼잖은가." 바스타아르가 지적했다. "쿤의 법도는 헛되이 힘을 쓰라고도 하지 않는다. 화살을 날리지 않을 거라면 어째서 활줄을 당기는가?"

 긴 시간 동안, 사냥지배자는 갈매기를 먼 거리에서 지켜보았다. "내가 이만한 거리에서도 목표를 맞출 수 있는지 가늠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천천히, 완벽하게 제어된 몸놀림으로 사냥지배자는 당겼던 활을 거둔 다음 화살을 화살통에 집어넣었다.

 바스타아르는 사냥지배자를 노려보았다. 바로 이래서 바스타아르는 최전선에서 싸우지 않는 안타암을 탐탁잖아 했다. 사냥지배자의 얼굴에 칠해진 흑백 선의 비타르마저도, 안타암에게 어울리는 전투와 힘보다는 시야와 수색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냥지배자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바스타아르가 쏘아붙였다. "갈매기를 죽이지도 않았지 않은가!"

 "모르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사냥지배자가 말했다. "행함으로써 아는 것은 경험이라. 행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 곧 지혜로다."

 쿤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바스타아르가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잡스런 강독 중에 나온 말이었으리라. 바스타아르는 그보다는 명령에는 복종해야 한다는 것과 쿤의 추종자가 아닌 이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훨씬 더 좋아했다. "이건 시간 낭비다. 네가 필요하다." 바스타아르는 사냥지배자에게 답답하다는 듯 성난 어조로 말했다. "죄수 두 명이 탈주했다. 하나는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벤투스의 마법사는 모두 죽인 것으로 안다만." 사냥지배자는 말했다. "투항하고 싸우지 않은 이들도 모조리 죽인 것으로 안다." 그 말에는 날이 서려 있었다.

 "마법사를 심문하고 믿을 수 있는 자를 가려낼 벤하스라스가 없는 이상, 우리한테는 놈들 모두에게 카멕을 복용시키는 것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바스타아르가 웃음을 지었다. 그건 안타암이 단독으로 행동할 때의 몇 안 되는 이점 중 하나였다. 안 된다. 이 마법사는 살아야 한다. 필요한 이상으로 해치지 말라, 고 간섭하는 벤하스라스가 없다는 것. "이 죄수는 천성을 숨기고 일반적인 바스처럼 행동했다."

 "마법사들에게는 카멕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지?" 사냥지배자의 목소리는 마치 바람 없는 날의 산중 호수처럼 잔잔했다.

 "용량을 측정할 벤하스라스가 없었다." 바스타아르가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래서 확실히 하기 위해 다량을 투여했다. 어느 사레바스도, 다른 골칫거리 죄수도 정신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이 또한 벤하스라스가 없을 때의 이점 중 하나였다. 벤하스라스는 늘상 제 용량의 절반만 사용하는 쪽을 선호했다. 사람의 정신을 옭아매기보다는 부수어 버리는 쪽이 훨씬 더 쉬운데도 말이다.

 "그대가 벤투스에서 행한 일에 관해 들은 바 있다. 이제 그 모두가 진실임을 알게 됐군." 사냥지배자는 바스타아르에게 경의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쿤의 추종자가 다른 쿤의 추종자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탈주한 죄수들을 추적하겠다. 가장 뛰어난 전사 열두 명을 내줘야 할 것이다."

 "열두 명의 가장 투철한 전사에 더불어 나도 같이 가야지." 바스타아르가 정정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였다. "바스는 내게 불복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가 명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냥지배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비록 사냥지배자가 안타암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약한 자일지언정, 진정한 전사이기보다는 사냥꾼이자 추적자에 불과할지언정, 바스타아르는 사냥지배자 역시 웃음을 지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냥지배자 뒤 저 먼 곳에서는 갈매기가 새된 소리를 한 번 지르고는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스트라이프는 숲을 가로질러 이동했다. 발걸음은 빠르고 확실했다. 그 옆에는―사실 옆이라고 하기에는 뒤처지는 때가 더 많았지만―바보 같은 매지스터가 씩씩거리며, 두 사람의 앞에 놓인 마른 낙엽을 있는 대로 밟아 소리를 요란스레 내면서 따라붙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소리가 있었다. 머리 위의 나뭇가지에서는 파삭이는 듯한 속삭임이 일었으며, 눈이 닿지 않는 곳에는 뭔가 커다란 것이 얕은 숨소리를 내며 도사리고 있었다. 알라산 숲은 그랬다. 스트라이프는 한때 여기를 귀기어린 곳이라고 여겼다. 이렐린은 영들이 예전에 존재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앞을 보자 무언가가 나뭇가지 위에서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햇빛을 등지고 선 터라 흐릿한 형체 말고는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스트라이프는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아들고는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로 활을 들어올렸다.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형체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뭐라도 잘못됐나?" 뮈리온이 스트라이프 뒤에서 헐떡였다.

 스트라이프는 화살을 다시 화살통에 밀어넣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내 기분을 다 염려해 주는 건가, 뾰족귀?"

 "숲에 서린 영이 우리 기분을 느낄까 봐 염려하는 게다." 스트라이프가 매섭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여기 걸맞은 존재라는 걸 안다. 그래서 영들이 나는 건드리지 않지. 하지만 네가 두려움을 품으면, 그건 신선한 피 냄새를 풍기며 뭔가 위험한 것을 유인하는 짓이나 다름없단 말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거다, 매지스터."

 뮈리온이 발끈했다. "난 열네 살 때부터 내 정신을 악마로부터 지켜 왔다. 시험까지 통과했다고. 욕망의 악마가 내가 좋아하던 남자아이 모습을 하고 나타났었지."

 "알라산의 영은 네 선생들이 널 시험하기 위해 불러낸 자그마한 도깨비불 같은 것보다 훨씬 오래되고 강력한 존재다. 네가 숲을 누비는 것보다는 영을 다루는 데 더 능숙하기를 바랄 뿐이야."

 "뭘 해도 숲을 누비는 것보다는 잘 할 거다만." 뮈리온이 풀숲을 쏘아보며 말했다. "난 민라투스의 정원에서도 길을 잃은 적이 있단 말이다. 결국에는 조경용 연못에 빠졌지."

 "하필이면… 등산을 좋아하는 매지스터와 엮일 수는 없었던 건가?" 스트라이프는 금세 하던 생각을 놓아 버렸다. 이 남자는 마법사였다. 제 입으로 악마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적어도 그건 믿어주어야 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마법사는 느리지만 꾸준히 스트라이프 옆에 서서 이동했다. 숨이 차는 와중에도 뭔가를 끊임없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들렸다.

 스트라이프는 그걸 마법 주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안쪽 발, 바깥 발, 안쪽 발, 바깥 발…" 뮈리온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걸 중얼거리고 있던 것이다.

 녹음 짙은 잎새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모양을 보아하니 오후 중반인 듯했다. 스트라이프는 손을 들어올리고는 멈췄다. 뮈리온은 몇 걸음 더 가다가 비틀거리고 멈춰섰고, 그 김에 스트라이더의 왼다리에 묶인 족쇄가 팽팽히 잡아당겨졌다. 뮈리온은 뒤늦게 신호를 알아듣고, 나무에 걸터앉아 축 처진 채로 마치 직전까지 목이 졸리기라도 한 양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포기한 건가?" 뮈리온이 숨을 달싹이며 물었다.

 "그렇게 숨을 쌕쌕이는 소리를 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나?" 스트라이프가 매섭게 대답했다. "뜀뛰기가 필요한 일은 순 노예한테만 맡겼던 모양이지?"

 뮈리온은 모욕적인 손짓을 해 보이고는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뮈리온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스트라이프 역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잎새가 바람에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먼 거리에서, 뭔가 다리가 많이 달린 것이 먹잇감을 쫓고 있었다. 새 한 마리가 가까운 곳의 나무를 쪼으며 벌레를 사냥하고 있었다.

 그 너머로, 금속이 쨍강이는 소리가 들렸다.

 "길란나인이여, 제 앞길을 보우하사." 스트라이프가 낮게 읊조리고는 뮈리온을 내려다보았다. "쉬는 시간은 끝이다, 매지스터. 등반을 시작해야 한다."

 "등반?" 마법사는 망연하게 스트라이프를 쳐다보았다.

 "쿠나리가 우리 뒤를 쫓고 있다." 스트라이프는 낮은 자리에 난 가지를 올라타고 커다란 나무에 성큼성큼 오르며, 뮈리온이 따라잡기를 기다렸다. "우리한테 유리한 위치를 확보해서 놈들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중인지, 아니면 우리 흔적을 포착하고 추적하는 중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니…" 스트라이프는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잡아당겨 미끄러운 이끼 밑의 고랑진 껍질을 드러낸 다음, 부드러운 동작으로 나뭇가지 위에 올랐다. 여간 자주 해 본 몸놀림이 아닌 듯했다. "그러니 등반이다."

 마법사는 어색한 몸짓으로 그 뒤를 따랐다. 스트라이프는 잠자코 기다렸지만, 결국에는 몸을 낮추고 다리를 몇 차례 내려 마법사가 따라붙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했다. 두 사람이 웃가지에 오르는 데에는 몇 분이 걸렸다. 스트라이프 혼자서라면 수 초만에 오를 수 있을 터였다. 마침내 나무에 올랐을 때, 마법사의 옷가지는 곳곳에 가지가 걸려 찢어지고 헝클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헛수고는 아니었다. 가장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오르니 아래의 나무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스트라이프는 숲의 가장자리에서 제법 먼 곳까지 도달했다는 것과―그래도 아직 충분히 멀리 오지는 못했다―바다를 가린 자욱한 운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나무 사이로 금속의 반짝임이 보였다.

 숲의 가장자리와 스트라이프가 있는 곳의 직선 거리상에 위치한 곳이었다.

 "젠장할." 스트라이프는 천천히 나무를 내려갔다. 뮈리온이 곧 이끼를 한움큼 쥐고서는 그 뒤를 따랐다. "놈들이 추적자를 대동했다. 놈들의 사냥지배자는 분명 이름값을 할 거다."

 "이렐린한테는 따돌릴 수 있다고 했잖아." 뮈리온은 비난조로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뮈리온은 미끄러졌고, 다음에 발을 디뎠어야 할 나뭇가지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슬이 팽팽히 잡아당겨졌고, 스트라이프는 툴툴거린 다음 마찬가지로 아래로 몸을 던졌다.

 "놈들의 사냥지배자 실력이 어떤지는 몰랐지 않느냐, 아니냐?" 스트라이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민첩하게 아래의 가지로 미끄러져 지면에 착지했다. 이번에는 뮈리온 쪽의 족갑이 빳빳히 당겨졌다. 뮈리온은 곧장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진흙탕에 몸을 박았다.

 "멍청한 놈." 하지만 뮈리온의 욕설에는 딱히 감정이 담겨 있지는 않은 듯했다. "이제 어쩔 거냐?"

 "비어 아산이다." 스트라이프가 말했다. "화살의 법도. 신속하고 고요하게 행하라. 정확히 맞추고, 망설이지 말라. 사냥꾼들이 즐겨 입에 올리는 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우리가 사냥감이지. 몇 시간쯤 내달리면 강이 하나 나올 거다. 거기서 사냥지배자를 따돌리도록 하지."

 뮈리온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준비되면 가자, 뾰족귀 놈아."

 스트라이프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안쪽 발, 바깥 발, 안쪽 발, 바깥 발… 마법사는 여전히 숨차 하면서도 그걸 중얼거리고 있었다. 느리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사슬이 춤추듯 움직이고 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짤랑였다.

 "아까 그 격언은 어디에 나오는 건가?" 뮈리온이 조금 뒤에 헐떡이며 물었다. "화살이 어쩌고 한 거 말이다?"

 "비어 타나달." 두꺼운 잎사귀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스트라이프는 손짓으로 왼쪽으로 향할 것을 지시했다. "세 그루 나무의 법도란 거다. 우리네 신 안드루일께서 전해주신 지혜지."

 "그렇군. 엘프 신들이라." 뮈리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들 덕을 참 많이도 보는구먼."

 스트라이프가 뮈리온을 쏘아보았다. "우리가 여길 살아서 탈출하면, 그건 안드루일께서 우리 민족에게 가르쳐 주신 지혜 덕택일 게다." 뮈리온은 뭐라 맞받아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스트라이프가 어깨로 뮈리온을 들이받아 나무에 부딪히게 하는 바람에 말을 놓치고 말았다. 뮈리온이 비틀거리느라 이끼에는 자국이 크게 남았다. 그거면 추적이 더 손쉬워질 터였다. 물론 사냥지배자는 이미 수월하게 두 사람을 추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냥의 여인을 입에 담을 때는 조심해라. 여긴 그분의 숲이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를 노려본 뒤 그를 밀쳐냈다. "좋다. 과연 그래서 엘프 제국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였나보군." 스트라이프가 주먹을 꼭 쥐자, 뮈리온은 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번갯불이 파지직거리며 일고 있었다. "아, 잠깐만. 테빈터가 엘프를 쫓아내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세운 뒤 야만스런 쿠나리를 수 세기간 막고 있었다는 걸 깜빡했군. 우리는 놈들과는 달라서, 빌어먹을 귀신 들린 숲에 마력을 풀어놓는 대신 우리 힘을 통제할 줄 알거든."

 스트라이프는 웃었다. "너희는 노예의 힘을 빌었을 뿐이다, 솀. 엘프 노예들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자길 노려보는 마법사 놈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스트라이프는 그 대신 단지 뮈리온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쿠나리는 우리가 떠들고 있는 지금도 너희 위대한 제국을 짓밟고 있다만." 스트라이프는 물러선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슬이 바짝 팽팽해졌다. "가자. 쉬는 시간은 끝이다."

 두 사람은 그 뒤로는 조용히 움직일 뿐이었다.

 강에 도착했을 때는 일몰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너비가 오십 보쯤 되는 강이었다. 암청색 물이 바위 주변에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깊이는 얕아서 조금만 신경 쓰면 헤엄치는 대신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법했다.

 "이리 와라." 스트라이프는 흰 물거품 쪽을 가리켰다. "저 밑의 바위를 이용하자."

 뮈리온은 조금 더 위쪽에 징검다리마냥 바위가 놓인 자리를 가리켰다. "왜 저길 쓰지 않고?"

 "사냥지배자가 우리 뒤를 쫓고 있지 않느냐." 스트라이프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뮈리온도 가만히 서서 버터기보다는 같이 움직이는 쪽을 선택했다. "마른 돌을 딛고 건너면 놈이 네 진흙투성이 샌들이 남긴 발자국을 알아차릴 거다. 물 속을 건너면 우리가 남긴 흔적이 지워질 테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강물은 그리 차지 않았다. 스트라이프는 조심스레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가며 최대한 물이 얕은 곳으로 지나가기 위해 애썼다. 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스트라이프는 방향을 틀어 뮈리온을 상류로 이끌었다.

 "왜 방향을 바꾸는 거지?" 마법사가 콸콸 쏟아지는 물 소리에 묻히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놈들은 우리가 직선 거리로 강을 건널 거라고 생각할 거다." 스트라이프는 말했다. "아니면 하류로 내려가거나, 그쪽이 더 쉬우니 말이다." 스트라이프는 해 질 녘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걸로 사냥지배자를 따돌릴 수는 없다 해도, 조금은 시간을 벌어줄 거다."

 "말이 되는군."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꼭 화해를 위해 건네는 인사 같았다.

 바위에 사슬이 걸리자 스트라이프는 멈춰섰다. 스트라이프는 사슬을 잡아당겨 걸린 것을 빼내고는 상류로 발걸음을 옮겼다. 뮈리온이 그 뒤를 쫓았다. 충분히 걸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트라이프는 일부러 조금 더 위로 걸어올라갔다.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건 언제나 실제 거리보다 조금 더 긴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스트라이프는 적당한 지점을 찾아 눈길을 돌렸다.

 "물 바깥으로 나가면," 스트라이프는 말했다. "최대한 흔적을 적게 남겨야 할 게다. 진흙투성이 발자국이나 바스라진 나뭇가지 같은 것들―그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놈들은 다시 갈피를 잡을 수 있다."

 "어떻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뜰 수 있지?" 마법사가 물었다.

 스트라이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탐색했다. "저기." 스트라이프는 강 가장자리에 선 커다란 암석을 가리켰다. 일단 저기로 오른 뒤에, 그 옆의 작은 바위로 뛴다. 그다음에는 저 쓰러진 나무둥치로 향하는 거다." 나무둥치에는 이끼 하나 끼어 있지 않았다.

 "진흙 묻은 발자국은 어쩌고?"

 스트라이프는 웃음을 지었다. "아마 강물이 네 샌들을 네가 거느렸던 노예들보다 더 말끔히 씻어내렸을 게다. 뭍으로 나서면 물자국은 오후의 태양에 금방 마를 거야."

 뮈리온은 못마땅한 눈길로 스트라이프가 가리킨 지점을 바라보았다. "저 바위 주변은 온통 모래와 진흙투성이이지 않은가. 한 번이라도 미끄러졌다간 장님이라도 훤히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고 말 거다."

 "그럼 미끄러지지 않으면 되지." 스트라이프가 대답하고는 뭍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거대한 바위에 이르렀다. 햇빛을 받아 오렌지 빛깔을 띤 납작한 바위로, 마치 발코니처럼 강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스트라이프는 가볍게 바위 위로 뛰어올랐지만, 이내 팽팽히 당겨진 사슬 때문에 엎어지고 말았다. 잠시 뒤 뮈리온이 숨을 색색거리며 바위에 올랐다.

 "좋아." 스트라이프가 일어선 뒤 마법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움직이는 거다, 매지스터." 뮈리온은 스트라이프의 손을 잡았고, 스트라이프는 뮈리온을 끌어당겨 두 발로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스트라이프는 다음으로 도약할 바위를 가리켰다. 두 사람이 서기에 충분히 넓적한 얼룩덜룩한 바위였다. "준비됐나?"

 뮈리온은 그렇다는 뜻으로 끙 하는 소리를 냈고, 두 사람은 바위를 향해 도약했다.

 스트라이프가 먼저 가뿐히 착지했다. 뮈리온이 뒤따랐지만 내려서며 스트라이프의 몸에 부딪히는 바람에 팔을 휘저으며 한 다리로 바위의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선 모양새가 되었다.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눈에 띄게 어질러진 흔적을 남길 것이 뻔했다.

 마법사가 스트라이프의 어깨에 팔을 짚고 몸을 겨우 끌어당겼다. "칠칠치 못한 미련퉁이 같으니!"

 "그게 네가 할 말인가?" 스트라이프는 마법사의 얼굴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대신에 쓰러진 나무둥치를, 그다음에는 두 사람 앞에 펼쳐진 어둑어둑한 숲을 가리켰다. 뭍이 감질날 정도로 코앞에 있었다. "셋을 센 다음에 뛰어 저기 내리는 거다. 이번에는 팔을 그 모양새로 휘젓지 말도록 해라, 매지스터. 하나―"

 "나는 매지스터가 아니라니까." 뮈리온이 종알거렸다.

 "둘…"

 스트라이프가 "셋"을 세기 직전, 화살이 그 등을 꿰뚫었다.


 엘프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뮈리온은 조롱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적어도 이번 한 번만큼은 야단을 피우며 빌어먹을 숲을 어지르는 게 자신이 아닌 엘프 쪽이었으니. 하지만 몸을 돌린 뮈리온은 엘프의 등에 꽂힌 화살이 몸을 뚫고 나온 것을 보았다. 이미 피가 몸통 왼쪽의 갈비뼈 아래에 흥건히 고인 상태였다. 엘프는 그대로 굴러 떨어져 진흙탕에 몸을 처박았고, 그 김에 사슬이 팽팽해져 뮈리온 또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뮈리온은 불안정하게 바위에 내려섰다. 위를 쳐다보자 방금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화살이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뮈리온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쿠나리는 하류 쪽으로 백 걸음쯤 되는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숫자는 적어도 열두 명이 넘었다. 활을 든 자는 사냥지배자로, 그는 우뚝 선 채로 벌써 시위에 다음 화살을 매기고 있었다. 이만한 거리에서도 뮈리온은 사냥지배자의 낯에 드러난 흑백의 물감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사나운 웃음으로 가득한 바스타아르의 금빛 물감을 칠한 얼굴이 비쳤다. 바스타아르는 윗부분이 저녁 정찬용 접시보다도 더 큰데다, 잔혹할 정도로 뾰족한 가시가 돋혀 뒤틀린 양날도끼를 들어올렸다. "바스!" 바스타아르는 고함을 질렀다. "너희가 비록 잽싸게 달아나긴 했으나 쿤이 결국은 우리를 너희에게로 인도했다! 바스타아르는 제 권속을 놓치는 법이 없느니라!" 그 순간 화살이 바스타아르의 밧줄 매듭으로 된 갑옷을 비스듬히 맞히고 튕겨나갔다. 바스타아르는 놀라 고함을 내질렀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가 이미 몸을 일으킨 것을, 그리고 이렐린이 스트라이프에게 건네준 활의 시위가 아직도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느냐, 바스타아드?!" 스트라이프가 소리쳤다. 복부를 화살에 꿰뚫린 것치고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스트라이프는 곧장 몸을 숙여 사냥지배자의 다음 화살이 머리통에 날아드는 것을 가까스로 피했다.

 "통나무 뒤로 숨어라!" 뮈리온이 마력을 끌어모으며 소리쳤다. 숲의 마력은 미끌거리는 듯 위험했다. 일순간은 무겁게 느껴지다가도 곧바로 통통 튀듯 가벼워지고는 했다. 뮈리온은 이전에도 장막이 보다 얇은 곳에서 주문을 시전하여 손쉽게 마력을 끌어당긴 경험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의식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스치듯이 무언가 다른 존재가 잠복하고 있었다. 뮈리온은 당장은 그 감각을 무시한 채로 마법을 구사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사냥지배자와 바스타아르가 주춤하는 사이, 다른 쿠나리들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육중한 검과 커다란 방패를 머리 위에 치켜든 채였다.

 뮈리온은 마력을 방출했다. 번개 줄기가 뮈리온의 손끝에서 튀기듯 뿜어져 나왔다. 파직거리는 전격이 쿠나리 하나를 감쌌고, 이내 쏜살같이 물을 건너 그 동료 쿠나리에게까지 적중했다. 번개에 맞은 쿠나리들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그건 재시카의 몫이다." 뮈리온은 낮게 읊조렸다. 분노가 뮈리온의 정신력을 고양시켰다. 그때 스트라이프가 몸을 날려 뮈리온을 덮쳐 쓰러뜨렸다. 사냥지배자가 날린 화살이 파열음을 내며 그 위를 지나쳤다.

 "통나무 뒤에 숨으라고 했었지." 스트라이프는 고통어린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뮈리온은 서둘러 일어났다. "안쪽 발, 바깥 발…" 두 사람은 함께 통나무가 았는 곳으로 줄행랑쳐 그 뒤에 웅크려 숨었다. "등은 좀 어떻지?"

 "이것 때문에 죽지는 않을 거다. 어디든 좋으니 화살깃 위로 좀 부러뜨려 주겠나?" 뮈리온은 등에 화살이 꽂힌 살벌한 광경의 섬뜩함을 애써 무시하고 화살을 붙잡은 뒤 부러뜨렸다. "됐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기다려 봐라." 스트라이프는 깊게 숨을 들이쉰 후 화살촉이 튀어나온 복부로 손을 뻗었다. 스트라이프는 재빨리 화살대를 잡고 몸에서 뽑아낸 다음 고통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안드루일 맙소사!"

 뮈리온은 금방이라도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지만, 스트라이프가 그 짓을 하고도 멀쩡하게 군다면 뮈리온 역시 그 짓을 본 뒤에도 멀쩡하게 굴어야 했다. "도망칠까?" 스트라이프는 부러진 화살을 내던진 뒤, 제 화살을 꺼내 자기 활에 매긴 다음 시위를 당겨 쏘았다. 강에 서 있던 쿠나리 하나가 목을 움켜쥐며 쓰러졌고, 스트라이프는 만족스럽다는 듯 흥 하는 소리를 냈다. "나한텐 화살이 스무 개 있었다. 이걸 다 비우기 전에는 죽고 싶지 않아."

 뮈리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제 몸에 마력을 끌어당겼다. 여전히 그 과정은 손쉬웠지만, 이번에는 전에 느낀 이질적인 존재의 감각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장막의 가장자리에 숨어든 무언가가 뮈리온이 마력의 실낱을 당길 때마다 뮈리온을 감지하고 있었다. 뮈리온은 이번에도 이물감을 무시한 채로 주문을 시전했고, 번개를 날려 쿠나리 병사 두 명을 강물에 처박았다. 번개를 맞은 쿠나리의 사지에는 경련이 일었다. 도깨비불 다트 놀이와 얼음으로 차게 식힌 포도주.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카페에서 대접받던 자그마한 페이스트리. 꿀을 바르고 견과류를 함께 넣어 구운 거였지… 그 모두가 벤투스와 함께 스러졌다. 뮈리온은 쿠나리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었다.

 그때 화살이 통나무를 관통해 박혔다. 뮈리온의 얼굴에서 불과 한 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 지점이었다. 뮈리온은 눈길을 강 건너로 돌렸고, 정확히 사냥지배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흑백의 줄무늬 뒤로 냉랭한 쿠나리의 눈이 보였다. 또다시 화살을 매겨 활을 당기는 그 눈매에는 신중한 슬기로움이 비쳤다. "너희는 나약하다, 바스!" 바스타아르가 소리쳤다. 놈은 강둑을 따라 도끼를 휘두르며 달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육편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희열로 웃음이 가득했다. "쿤이 너희에게 복종을 가르치리라!"

 스트라이프가 화살을 한 발 더 쏘았다. 이번 화살은 바스타아르의 밧줄매듭 갑옷을 잡아채어 나무에 붙들어 놓았다. "오십평생 살면서 복종하는 법을 배울 기회는 차고 넘쳤다. 바스타아드 놈아!" 스트라이프는 소리쳤다. 이제는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고 있었다. "네놈보다 강인한 자들도 날 가르치려 들다가 실패했지." 그 사이 사냥지배자는 다시 한 번 통나무를 관통하는 화살을 날려 스트라이프의 팔을 꿰뚫었다. 스트라이프는 고통에 차 끙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뮈리온은 손을 들어올렸다. 장막이 엷다면, 이 자리에서 뮈리온의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볼 만 했다. 뮈리온은 장막을 가로질러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숲이 분노로 울부짖었다.

 뮈리온의 주문은 파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실패했고, 그 틈에 나무와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형체가 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크기는 거의 골렘만큼이나 크고, 네 개의 목질 다리와 암석제 발에는 룬과 이끼가 가득했다. 몸뚱이는 덩굴손에 휩싸인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괴물체는 나무로 된 위압적인 팔을 들어올렸다. 각각의 팔에는 두터운 금속으로 된 칼날이 달려 있었고, 날끝은 리륨으로 빛나고 있었다. "듀맛 맙소사." 뮈리온은 괴물이 주변 사물을 쓰러뜨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뮈리온은 다시금 주문 시전을 준비했지만, 스트라이프가 손으로 뮈리온의 어깨를 두들기며 만류했다. "마법은 안 된다! 저건 숲 수호자야!" 스트라이프는 뮈리온을 잡아당겼고, 두 사람은 동시에 물러나 비틀거렸다. 사슬이 뿌리에 걸리는 바람에 뮈리온은 넘어지고 말았다. 그 옆의 스트라이프 또한 자리에서 요동쳤지만, 그 손은 흔들림 없이 괴물 앞에 들어올려 보인 채였다. "안다란 아티시안! 안다란 아티시안, 젠장! 이렇게 하면 먹혀야 하는데!"

 또 한 번 화살이 날아을어 뮈리온 옆의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뮈리온은 하류에 선 사냥지배자를 한 번, 그리고 다시 숲 수호자를 한 번 바라보고는 외쳤다. "마법을 쓰지 않으면 난 싸울 수가 없어!"

 주변에서는 쿠나리 전사들이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뮈리온과 스트라이프의 퇴로가 차단될 것이었다.

 "애초에 저것과는 싸울 필요가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이야! 안다란 아티시안!"


 뮈리온은 사냥지배자를 바라보았다. 벌써 다시금 화살 한 발을 활에 매기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뮈리온은 사슬을 잡아채어 뿌리를 떨친 다음, 스트라이프를 붙들고 왼쪽으로 당겼다. 이제 거대한 숲 수호자가 사냥지배자와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안쪽 발, 바깥 발, 안쪽 발, 어서, 젠장할!" 수호자를 지나치며 뮈리온은 사냥지배자가 줄무늬 물감을 칠한 얼굴을 찌푸리며 활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았다. "말 좀 들어라, 멀청한 돌덩어리야, 난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스트라이프가 잰걸음을 치며 수호자에게 외쳤다.

 수호자는 거대한 칼날 달린 팔을 들어올렸다 … 하지만 쿠나리 전사 중 한 명이 뒤에서 공격을 날리자 그대로 멈춰섰다.

 수호자는 즉시 반응했다. 움직임을 멈춘 뒤 몸을 돌려서는, 쿠나리 전사를 향했다. 전사는 여전히 무기를 든 채였다. 크고 두터운 칼날로 브론토 한 마리를 한 방에 두동강낼 만큼 커다란 무기였다. 하지만 쿠나리에게는 안타깝게도, 수호자는 브론토보다도 더 큰 괴물이었다.

 숲 수호자는 칼날 달린 팔을 내려 병사를 단숨에 베어갈랐다.

 "좋아. 서로 죽이라고." 뮈리온이 중얼거리고는 스트라이프에게 몸을 돌렸다. 스트라이프의 낯빛은 파리하고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어서, 이 뾰족귀 놈아! 내가 포기하기도 전에 먼저 나가떨어질 셈이냐?" 그제서야 스트라이프의 눈에 초점이 다시 맞춰졌다. "그럴 일 없다, 매지스터 놈아." 안쪽 발, 바깥 발, 안쪽 발, 두 사람은 뛰어 내달렸다.


 싸움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도망쳤을 때 즈음하여 스트라이프는 주저앉았다. 뮈리온에게 팔에서 화살을 뽑아내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뽑아도 확실한 건가?" 마법사가 물었다.

 "이 꼴로는 화살을 쏠 수가 없잖아, 그건 확실하다." 스트라이프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통나무를 관통하다니, 활 한 번 강력하군. 나한테 그런 활이 있었더라면…" 상처는 깨끗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스트라이프는 피를 많이 흘린 뒤였다. "치유 마법 아는 거 없나?" 스트라이프가 복부를 감싸쥐고 물었다.

 "조금은 안다만. 난 번개 마법에 더 능했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의 팔에서 화살을 뽑아들었고, 스트라이프는 끙 하는 소리를 한 번 내고는 신음을 참았다. 스트라이프는 어둠이 고통 서린 낯빛을 가려주기를 바랐다. "한때 재시카라는 친구가 있었다. 영과 함께하는 마법에 정통했지. 한 번은 어느 남자의 잘려나간 손을 원래대로 붙인 적도 있다."

 "듣자하니 강력한 마법사였던 것 같군."

 "그렇지만 역부족이었지." 뮈리온은 어둠 속에서 탄식했다. "그 친구를 아까 천막에서 봤다." 스트라이프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렇다면 그 친구와 탠트 두 사람 모두에게 안식을 준 거로군."

 "그건… 재시카는 나한테 몇 가지 술법을 가르쳐줬었다." 뮈리온은 재빠르고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어쩌면 적어도 네 상처를 봉합할 수는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제 마법을 사용해도 안전한가?"

 "숲 수호자는 희귀한 존재다. 오늘 안에 한 마리를 또 마주칠 일은 없을 게야." 스트라이프는 은은한 온기가 등허리께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는 약간 긴장을 풀었다. "고맙다."

 스트라이프의 귀에 옷가지를 찢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지 보지."

 "활만 쏠 수 있다면야 상관없다." 남은 화살이 얼마나 되더라? 18개? 어쩌면 19개인지도 모른다. "네가 뽑아낸 화살은 어떻지? 아직 사용할 수 있나?"

 "몸을 기대고 누울 향수 뿌린 베개는 필요 없나?" 뮈리온이 간이 붕대를 스트라이프의 복부에 두르며 말했다. 뮈리온은 천을 스트라이프의 팔 아래로 여러 번 단단히 매어 묶었다.

 "그건 나보다는 너한테 더 어울리는 것 같다만, 매지스터." 붕대가 단단히 조여들 제 스트라이프는 몸을 움찔거렸다. "솜씨가 나쁘지 않군. 피의 의식을 치른 다음 노예한테 붕대를 감아준 적이라도 있는가보지?"

 "난 애초에 노예 같은 거 없어, 이 뾰족귀 멍청아."

 스트라이프는 고개를 돌려 눈썹을 치켜들었다. "난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매지스터와 얽히게 된 거람?"

 "난 매지스터가 아니라니까! 뮈리온이 스트라이프를 노려보았지만,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뮈리온의 눈썹만 간신히 분간이 되는 수준이었다. 뮈리온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매지스터는 유력한 가문에서나 배출되는 거다! 우리 가족은 노예였어. 난 마법이 발현된 이후에나 겨우 시민권을 얻었다. 우리가 일하던 공장의 소유주가 날 그쪽 가문으로 입양한 덕택에 말이다." 뮈리온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나는 보잘것 없는 놈이란 말이다. 벤투스에 널린 빛나는 가로등을 알지? 나는 마법으로 그걸 밝히는 일을 한다. 그게 내 직업이라고."

 스트라이프는 조심스레 팔을 뻗어 보았다. 활을 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나도 비밀 한 가지 털어놓을까?" 스트라이프는 제 발로 일어섰다. 이제야 다리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난 스탁헤이븐의 엘프 격리촌에서 자랐다."

 "난 네가 데일스 엘프인 줄 알았다만." 뮈리온이 말했다.

 "입이 주책이라고, 말을 함부로 지껄인 덕분에 사고에 휘말렸지." 스트라이프가 웃으며 말했다. "믿기 힘들다는 건 나도 안다. 엘프 어린아이들을 때리던 경비병을 두들겨팼지. 그랬더니 더 많은 경비병을 끌고 다시 나타나더군. 결국에는 숲으로 쫓겨났다. 데일스 엘프가 날 찾아내어 부족에 받아들여 줬고. 그 뒤로 부족에게서 익힐 만한 건 거진 다 익혔지만…" 뮈리온은 웃기 시작했다. "너도 보잘것없는 녀석이었군."

 스트라이프는 씩 웃어 보였다. "자,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내 화살통에는 화살이 열댓 개 있고." 스트라이프는 깜깜해진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쿠나리는 우리 뒤를 바짝 쫓아왔었다. 숲 수호자가 놈들을 모조리 처치하기를 바라고만 있을 수는 없어."

 뮈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친구는 자정에 돌아오겠다고 했었지. 그때까지 놈들을 따돌릴 수 있을 것 같나?"

 "나도 모른다." 스트라이프는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부상을 입은데다가, 너는…"

 "숲과 관련된 거라면 뭐든 엉성하기 그지없다고?" 뮈리온이 끝맺었다.

 스트라이프는 웃었다. "익숙하지 않은 거라고 해두지." 그리고 스트라이프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안 되겠다. 몇 시간은 더 버틸 수 있을 테지만 결국에는 따라잡히고 말 거야."

 "그렇군, 그럼." 뮈리온이 스트라이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놈들이 후회하게 만들어 주자고."


 네 번째 쿠나리 경비병이 숲 수호자의 칼날에 쓰러지자, 사냥지배자는 행동에 나설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바스타아르와 경비병이 괴물을 베는 동안, 사냥지배자는 활을 집어넣고 길다란 창을 준비했다.

 사냥지배자는 가볍게 지면을 딛고 조급하지 않은 보폭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숲 수호자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괴물은 칼날을 신속하게 휘둘렀지만, 그 움직임에는 일정한 경향성이 있었다. 사냥지배자는 잠시 정지하고, 기다렸다 … 그의 창이 소용돌이치는 칼날 사이로 날아들어 괴물의 목, 정확히는 괴물에게 목이 있었더라면 그 자리일 거라 짐작되는 부위를 꿰뚫었다. 넓적한 창날이 돌을 관통했다.

 숲 수호자는 일순간 경직을 일으켰다. 괴물이 사냥지배자 쪽으로 몸을 돌리는 사이 바스타아르와 휘하 경비병들은 괴물의 다리를 난도질했다. 수호자의 칼날이 석양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사냥지배자는 한 쪽으로 발을 옮겼다. 칼날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또 한번 칼날이 휘몰아쳤지만 사냥지배자는 창을 살짝 움직여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공격을 흘렸다. 그리고는 다시금 창을 날렸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전력으로 가한 공격이었다.

 사냥지배자의 창이 첫 번째 공격으로 생긴 구멍에 다시금 꽂혔다. 수호자의 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괴물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 마법이 무엇이든 간에, 사냥지배자의 창이 그걸 깨부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수호자는 바닥에 쓰러졌다. 칼날 달린 팔은 여전히 씰룩거렸고, 어리석은 경비병들은 계속해서 그걸 난도질했다.

 "그만하면 됐다!" 사냥지배자가 매섭게 외쳤다.

 "이 괴물이 정말로 죽었는지 확실히 해야 한다!" 바스타아르가 자신의 거대한 무기를 내리쳐 수호자의 칼날 달린 팔을 부러뜨리는 동시에 고함쳤다.

 사냥지배자는 앞으로 나서 바스타아르의 어깨를 붙들었다. "애초에 그대 경비병이 먼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싸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바스타아르는 사냥지배자의 손아귀를 뿌리쳤다. "이건 이치를 거스르는 괴물이다!"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 사냥지배자는 마법사와 궁사가 엄폐했던 통나무를 바라보았다. "이 괴물은 쿤이 알지 못하는 존재이고, 우리 사냥감은 숲 속 깊이 달아났다." 사냥지배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놈들을 그냥 도망치게 두어야 한다."

 "뭐라고? 어째서냐?"

 사냥지배자는 바스타아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얼굴은 격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건 애초에 흠결 있는 사냥이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요소가 너무 많다."

 "이해해야 할 게 달리 뭐가 있단 말이냐?" 바스타아르가 마법사와 궁사가 도망친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놈들은 바스다. 내 밑의 바스! 너는 놈들을 추적하고, 우리는 놈들을 죽일 따름이다."

 "그 중 하나는 엘프였다." 사냥지배자가 지적했다. "도시에서는 붙잡혔을지 몰라도, 놈은 이 숲을 자유자재로 누비고 다닌다. 이 숲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마법이 서려 있다. 하지만 엘프는 그에 관해 알고 있다. 경비병을 더 데리고 와야 한다, 그에 더불어 숲을 다니는 데 능숙한 아쉬아드도―"

 "바셰단." 바스타아르는 자신의 거대한 무기에서 더께를 훑어내며 말했다. "내가 죄수 노역을 감독하는 한은, 내 명령에 따라라!" 그때 경비병 중 하나―이제는 일곱밖에 남지 않았다―가 바스타아르 곁에 머뭇거리며 섰다. 바스타아르는 고개를 돌려 쏘아붙였다. "뭐냐?"

 "바스타아르." 경비병이 주저하며 말했다. "병사 중 한 명이 큰 부상을 입어 더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치유사의 처치가 필요합니다."

 사냥지배자는 쓰러진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경비병의 얼굴을 보아하니 고통을 극기심으로 참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상처는 지저분했고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다.

 바스타아르는 곧장 부상당한 경비병을 베었다.

 "이제 더는 필요치 않다." 바스타아르가 말했다. "움직여라!" 바스타아르는 탈주한 죄수들을 쫓아 저벅저벅 나아갔고, 주눅이 든 경비병들은 그 뒤를 쫓았다.

 사냥지배자는 오래도록 죽은 경비병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 역시 바스타아르를 쫓아 숲 깊은 곳으로 향했다.


 달이 뜬 지 오래였다. 파리한 달빛이 가지 사이로 새어나와 숲의 밑바닥을 비추었다. 그때 뮈리온과 스트라이프는 또다시 자신들의 뒤에서 큰 발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이제는 심하게 더러워진 사슬이 뿌리에 걸리는가하면, 깜깜한 어둠에 돌부리가 숨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스트라이프는 부상 때문에 날래게 움직일 수가 없었고, 뮈리온 역시 너무나 지쳐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뮈리온은 결국 넘어져 엎어졌고, 스트라이프가 넘어진 뮈리온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둘러매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안쪽 발, 바깥 발, 안쪽 발, 바깥 발.

 "언제 맞서서 싸울 텐가?" 뮈리온이 달리느라 헐떡이며 물었다. "조금만 더 가자." 스트라이프가 말했다. "방향을 가리키는 손처럼 생긴 고목을 맞닥뜨리면, 왼쪽으로 틀어라."

 "알았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금속이 나뭇가지에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탁 트인 평지였더라면 뒤돌아봤을 때 놈들이 훤히 보였을 것이었다. 발각되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두 사람 앞의 공터를 지나자 자그마한 언덕이 어렴풋이 보였다. 열 걸음 정도 높이에, 이끼가 끼고 가파른 언덕이었다. 그 앞에는 쓰러진 나무가 튀어나와 있었다. 뒤틀린 가지를 보니 그 모습이 묘하게도 움켜쥔 손가락처럼 보였다. 손가락 중 하나는 방향을 가리키듯 뻗어 있었다. "저기다." 스트라이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뮈리온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무뿌리로 인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듯한 계단을 올랐다. 미끌미끌한 이끼에 샌들을 신은 발을 헛디딜 뻔했지만, 스트라이프가 뮈리온을 붙잡아 주었다. 금세 두 사람은 조금 전에 뮈리온이 보았던 언덕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여기서 버티고 싸우는 거다." 스트라이프가 말했다. 뮈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쿠나리가 이 어두운 가운데서 계단을 찾아낼 것 같지는 않다."

 "비어 아달렌." 스트라이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달빛에 그 이가 희도록 빛나 보였다. "숲의 법도. 항상 그 은혜를 유념하며 사냥감을 취하라. 보통 같으면 끼니를 위해 사냥하는 동물을 이르는 말이겠지만, 이 경우에 사냥감의 은혜란 내가 이 작은 언덕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두고 말하는 게지."

 "너희가 섬기는 사냥의 여인에게서 우러나온 지혜인가? 어쩌면 너희 신들도 쓸모가 있기는 한 모양이군." 뮈리온은 마력을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힘은 곧장 빠르고 강력하게 들어찼다. 숲 수호자가 나타나기 직전에 느꼈던 불안감은 이번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최대한 상류 계급 억양을 흉내내며, 뮈리온은 덧붙였다. "내 노예들이 안드루일을 흉본 걸 뉘우치게끔 하지." 옆에 선 스트라이프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활에 화살을 매겼다. "꽤 나쁘지 않구나, 매지스터."

 "너도 마찬가지다, 뾰족귀."

 쿠나리가 공터로 들어섰다. 스트라이프는 곧장 첫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경비병 하나의 어깨에 적중했고, 경비병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뒤로 물러났다. 뮈리온은 마력을 방출했다. 그러자 번개 줄기가 뻗어나와 쿠나리 둘을 맞혔다. 번개를 맞은 경비병들은 몸을 떨며 쓰러졌다. 화살이 뮈리온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뮈리온은 몸을 숙였다. 숲 가장자리에는 사냥지배자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스트라이프는 벌써 화살 한 발을 또 매겨 쏜 참이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화살을 쏘아 날렸다. 사격이 어찌나 날랜지 매번 쏠 때마다 손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경비병들은 고통과 노기로 울부짖으며 서서히 다가왔다. 일부는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뮈리온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번개를 품은 구름이 언덕의 밑부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구름 안에 갇힌 쿠나리들은 번갯자락에 지져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사이 스트라이프는 또 한 명의 목에 화살을 쏘아 맞혀 쓰러뜨렸다. 그때 육중한 손이 언덕 꼭대기의 가장자리에서 불쑥 나타나 뮈리온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뮈리온은 기습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격통이 뮈리온을 덮쳤다. 뮈리온은 화살이 스치고 지나간 오른팔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손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곧장 바스타아르가 가장자리를 타고 언덕에 올라섰다. 다른 손에는 그 거대한 도끼가 들려 있었다. "바스!" 바스타아르가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고함쳤다. 그는 이내 스트라이프를 손등으로 후려갈긴 다음 활을 빼앗아 부러뜨렸다. 스트라이프는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잘도 도망다녔다만, 이제는 누구도 안타암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을 때다!"

 끝장이었다. 뮈리온은 스트라이프 곁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스트라이프는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뮈리온은 엘프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언덕을 완전히 올라 두 사람 앞에 선 바스타아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공터에 흩어져 있던 다른 쿠나리 역시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여전히 쓰러져 있는 스트라이프가 뮈리온의 손을 세게 한 번 움켜쥐었다.

 팔의 통증 때문에 약간 불안했지만, 뮈리온은 버텼다. "멍청한 황소인간 놈." 뮈리온은 쏘아붙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네놈은 날 죽이지 못한다! 날 한 번 봐라!" 뮈리온은 다치지 않은 팔을 들어 보였다. 달빛에 비친 표정은 바스타아르의 낯빛에 비길 만큼 자신만만해 보였다. "우리가 죽인 네놈 경비병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느냐? 우리 둘을 한 사슬로 이어맸을 때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알기는 하는가?"

 "내가 무슨 일을 했다는 거냐, 조그만 바스야?" 바스타아르가 도끼를 뮈리온의 목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넌 우리에게 하나되어 행동하는 법을 가르쳤다." 뮈리온이 말했다. 그런 다음 재빨리 덧붙였다. "안쪽 발!" 뮈리온과 스트라이프는 동시에 안쪽 발을 내딛었다. 뮈리온과 스트라이프의 다리를 서로 이어맨 족쇄가 바스타아르의 발목께를 휩쓸었고, 거대한 쿠나리는 뮈리온 위로 쓰러졌다. 바스타아르의 도끼는 어둠 속에 놓친 탓에 찾을 길이 없었다. 뮈리온은 밀어붙이고 스트라이프는 발길질을 가한 끝에, 바스타아르는 공터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다 뒤로 뒹굴며 미끄러졌다. "지금! 사슬을!" 스트라이프가 고함쳤다. 바스타아르가 뮈리온의 몸에서 떨어지자 스트라이프는 반대편으로 뛰어넘어가 바스타아르의 목에 쇠사슬을 걸었다. "당겨!"

 바스타아르의 몸무게에 족쇄가 채워진 다리가 쥐어짜이듯 아파 왔다. 뮈리온은 몸을 달싹였다. 거대한 쿠나리는 두 손을 들어 목 언저리에 있는 쇠사슬을 움켜쥐었다. 뮈리온은 바스타아르가 언덕 꼭대기 가장자리에 매달린 채로 다리를 버둥거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터였다. 뮈리온이 일으킨 번개 구름은 흩어진 뒤였고, 다른 쿠나리들이 이미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나머지 쿠나리가 지휘관을 구속에서 풀어준 다음 두 사람을 죽일 게 뻔했다.

 뮈리온은 부드러운 흙에 발을 끌며 나아갔다. 바스타아르의 몸무게 때문에 언덕 가장자리로 끌려당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뮈리온과 스트라이프의 노력은, 그 모든 계획은 허사였다. 바스타아르는 한 손으로는 부드러운 흙을, 다른 한 손으로는 목에 감은 쇠사슬을 잡으며 목이 졸린 듯한 고함을 질렀다.

 쿠나리 두 명이 언덕 꼭대기에 올라 몸을 일으켰다. 둘은 뮈리온보다 키가 훌쩍 컸으며, 그 손에 쥔 도끼는 달빛을 받아 마치 백골처럼 빛났다.

 그때 눈처럼 새하얀 올빼미 한 마리가 유유히 나타났다. 달빛 사이의 유령 같은 형체였다.

 올빼미는 뮈리온과 스트라이프 사이에 내려앉았다. "자정이 됐군." 스트라이프는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올빼미 주변의 공기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일순간 거대한 곰 한 마리가 언덕 위에 버티고 섰다. 곰은 쿠나리를 향해 울부짖으며 개중 하나를 커다란 발톱으로 후려갈겼다. 갑옷을 뚫고 살점이 갈가리 찢어졌다. 쿠나리는 언덕에서 아래의 공터로 고꾸라졌다. 다른 한 명의 쿠나리가 도끼를 휘둘렀지만, 곰은 무기의 자루를 아가리로 물어 막고는 강한 턱힘으로 자루를 으스러뜨렸다. 곰은 다시금 발톱으로 쿠나리 전사를 휘둘러쳤고, 그 역시 아래의 공터로 굴러떨어졌다. 곰은 숲의 진노를 대변하는 듯 우렁차게 포효했다.

 "사냥지배자!" 바스타아르가 고함쳤다. 아직도 발을 버둥거리며 목에 감긴 사슬을 붙들어맨 채였다. "의무를 수행해라! 쿤을 위협하는 자들을 처단하라!"

 "그러지." 사냥지배자가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었다 … 바스타아드."

 사냥지배자가 활을 옆으로 내던지자 갑작스런 침묵의 충격이 공터를 휩쓸었다. "안타암, 내게로!" 바스타아르는 목메인 소리로 외쳤다.

 "나는 안타암이 아니다." 사냥지배자는 미소를 지었다. 바스타아르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사냥지배자를 바라보았다. 일순간 물 흐르듯 유려한 움직임으로 사냥지배자는 창을 등에서 뽑아 공터를 가로질러 투척했다. 창에 직격당한 바스타아르는 잠시 몸을 떠는가 싶더니, 곧 고요히, 미동도 하지 않고 늘어졌다.

 이제 무기를 손에 쥐지 않은 사냥지배자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마치 근사한 무도회에 참석하기라도 한 양으로 손을 허리춤에 두고 격식을 갖춘 절을 했다. 사냥지배자의 전투 물감 아래 냉랭한 표정은 공손한 미소로 바뀌었다. "나는 벤하스라스의 사아르브라크다." 그는 말했다. 그러자 다른 쿠나리들은 재빨리 물러나 뮈리온과 스트라이프, 그리고 곰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마치 갑작스레 사냥지배자가 가장 큰 위협요소로 변모하기라도 한 듯했다.

 "소문을 들었다." 사아르브라크는 공터에 모인 쿠나리를 바라보며 나아가면서 말했다. "벤투스를 점령한 안타암이 쿤의 도리와 어긋나게 행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사아르브라크의 어조에는 실망감이 섞여 있었다. "바스 일부가 우리를 괴물로 칭한다는 소문을." 사아르브라크는 언덕 위의 뮈리온 일행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행위야말로 쿤에 대한 위협이다."

 "하스 에발라바르아드 네라아." 사아르브라크가 바스타아르의 몸에서 창을 뽑아들며 말했다. "내가 돌보는 이들을 위하려면, 나 또한 그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는 창을 느슨하게 쥐었다. 들어올리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즉시 그렇게 할 태세였다.

 곰 주변의 공기가 희미하게 빛나는 듯하더니 이렐린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렐린이 걸친 모피와 가죽으로 된 옷에 달빛이 비쳐 광택이 일었다. 이렐린은 쿠나리를 내려다보았다. "가서 목숨을 부지해라, 벤하스라스의 사아르브라크." 이렐린이 말했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사아르브라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활을 집어들고는 인사의 표시로 살짝 들어보였다. "이걸 다루는 것보다는 창술이 더 낫더군."

 "내 눈에는 대단한 궁사로 보였는데." 스트라이프가 부상을 입은 복부를 감싸쥐고 말했다.

 "난 네 팔을 노렸었다." 사아르브라크는 씩 웃어 보이고는 대궁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행운을 빈다." 사아르브라크는 다른 쿠나리를 엄중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쿠나리들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그를 따라갔다. 곧 공터에는 뮈리온과 스트라이프, 이렐린, 그리고 바스타아르의 시신만이 남게 되었다.

 스트라이프는 발을 끌며 느릿하게 나아가 다리를 들어올렸다. 신음 같은 금속의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스타아르의 시신은 가파른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가 바닥에 맞부딪혔다. "아슬아슬했다, 이렐린." 이렐린은 스트라이프를 쳐다보았다. "자정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적어도 두 시간 이상 남았어. 내가 제때 나타난 걸 다행으로 여겨."

 스트라이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자물쇠 따개를 챙기라고 했던 건 까먹었을 테지."

 "서두르느라고." 이렐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인간의 발을 잘라낼 수도 있는데." 뮈리온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스트라이프는 다시 웃기만 했다. "아까 그자가 내게 남긴 활로 쏴버릴 수 있을지도 몰라."

 "애초에 당길 수나 있으면 용하게." 이렐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저건 당신 키만큼이나 커."

 "훈련을 좀 하면 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스트라이프가 대꾸한 다음 절뚝이며 바스타아르의 거대한 도끼로 향해 나아갔다. 스트라이프는 양손으로 도끼를 쥐었다. "일단은 이걸로 어떻게든 해야겠군. 뮈리온, 움직이지 말고 딱 가만히 있어라."

 뮈리온은 부상을 입은 팔이 고동치는 것을 무시하려고 애쓰면서 긴장을 풀었다. "그쯤이야."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세 번이나 도끼를 내리쳐야 했다. 그때마다 고통스런 잔향이 뮈리온의 다리에 울렸지만, 족쇄에 걸린 빗장은 마침내 부러졌다. 스트라이프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족쇄는 그의 뒤로 질질 끌리다 덜컹거리며 풀숲에 떨어졌다. 그는 도끼를 떨어뜨리고 허리를 쭉 폈다. "아, 드디어."

 뮈리온은 다리를 뻗고 부서진 족쇄를 흔들어 풀었다. "내가 그리워도 참도록 해." 스트라이프가 웃었다. "나는 이제 진이 쪽 빠졌어, 이렐린. 괜찮다면 야영지를 차린 다음 좀 쉬었다가 아침에 부족에게 돌아가지."

 "이자는 어쩌고?" 이렐린이 뮈리온을 가리키며 물었다. "알아, 안다고. 나 역시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거." 뮈리온은 손사래를 쳤다. "팔에 붕대를 감고 하룻밤 푹 쉬게 해주기만 하면 난 갈 거야."


 스트라이프가 뮈리온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다치지 않은 쪽 팔이었다. "네 말이 맞다, 솀.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뮈리온은 나이 많은 엘프에게 머뭇거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날 아침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살아서 맞이할 수는 있을 터였다.


 

  1. 원문: bas-taard, 바스타아르bas-taar와 후레자식이라는 뜻의 영단어 bastard의 발음이 비슷한 점을 노린 언어유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