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
루카스 크리스티얀슨
서덜랜드는 투구를 벗고 하늘보루를 오롯이 눈에 담았다. 기억에 남은 그대로, 전혀 퇴색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루하루가 최고의 나날이었지.” 서덜랜드가 말했다.
세 사람은 동틀 무렵 도착했다. 샛길 유랑자의 일원이자, “서덜랜드 부대”가 그 이름을 얻은 이유이기도 한 배후지의 도널 경. 비밀스럽고 빼어난 음유시인이며, ‘이브솔의 여인’이란 이명으로도 불리는 셰이드 경. 그리고 특별 표창을 받은 자유 마법사, 데일안의 보스 경까지.
이들 모두는 한때 심문회 휘하 모험 부대원이었고, 최근에는 자신만의 작은 영지와 소소한 작위를 하사받기도 했다. 그간 접경지대를 순찰하고, 이웃 영지 명사들과 인사를 나누며 꼬박 한 달을 내달린 터라 휴식이 절실했지만, 이번 부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늘보루에 어둠이 드리웠다는 소식에 대응할 이들은 그들이 유일했으니까.
출입이 금지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행로라면 으레 그렇듯이, 하늘보루로 통하는 산길은 여전히 흔적이 선명했다. 그렇지만 서덜랜드는 한 주가 꼬박 걸릴 등반을 그런 흔적 없이, 눈을 가린 채로도 해낼 수 있었다. 전에도 그래 보았으니까. 아니,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만큼 익숙했다. 수천 명의 사람이 이 길을 더듬어 올랐다. 눈보라와 얽힌 나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산맥이 가림막 열리듯 갈라지며 광활한 계곡과 거대한 요새 하늘보루가 드러날 때면, 그 수고는 어김없이 보상받고는 했다.
이제 계곡은 버려졌고, 차가운 돌 위, 꺼진 화톳불 흔적만이 점점이 남아 있었다. 한때 이곳을 피난처 삼았던 수많은 사람의 흔적이었다. 서덜랜드에게 이곳은 단순한 피난처 이상이었다. 그는 여기서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삶의 목적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에 다시 돌아오라는 부름은 또 다른 목적을 주었다.
“뭐가 보여?” 서덜랜드가 어깨 너머로 외쳤다. 일행은 바위 사이 고지대에서 하늘보루를 조망하고 있었지만, 높은 석조 흉벽 때문에 주 성채의 상층부와 안뜰 건물의 지붕만 보일 뿐이었다.
보스가 손짓해 지각력 증강 주문을 종료했다. 짜증 때문인지 그 뾰족한 귀가 씰룩이고 있었다.
“움직임은 없어.” 보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기척이 없다고 해서 요새가 비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표적은 없었지만, 셰이드는 신중하게 활에 화살을 메겼다.
“관리인들이 우리를 발견해서 표식을 남겼어야 하는데.” 셰이드가 서덜랜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이상해.”
서덜랜드는 셰이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우리가 온 거잖아.” 그는 투구를 다시 쓰고 출발 신호로 손짓을 주었다. “정문 계단으로 가자.”
단호한 태도로 안심을 주긴 했지만, 사실 별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하늘보루에 접근할 경로는 단 하나뿐이었고, 그 길을 지날 때면 언제나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그리고 자신이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는 했다.
“기억해. 이곳도 우리를 느낄 거야.” 보스가 말했다.
“좋네.” 서덜랜드가 말했다.
심문회가 활동을 종료한 이후, 두 가지 숫자가 화두로 떠올랐다. 첫 번째는 “일만”. 심문관이 여러 국가에서 끌어들였다고 하는 병사, 암살자, 외교관, 그리고 온갖 자유 용병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의도적으로 부풀려 추정한 수였다. 심문회는 국가가 아니라 이상에 충성하는, 거대하며 불안정을 초래하는 민병대였다. 적어도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두 번째 숫자는 이들에게 더한 근심을 주었다. “하나”, 유력자들은 카리스마 있는 악인 단 한 사람만으로도 심문회의 군사력이 오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문회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심문회의 본질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졸렬한 자의 손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변모할 수 있는지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늘보루 또한 그 자체로 특별한 문제였다. 이 고대 요새는 심문회 활동의 중심지였다. 너무나 상징적이어서 파괴할 수는 없었지만, 하늘보루에 몸담은 이들이 감내할 수 있는 모욕에도 한계는 있었다. 한편으로 이곳은 너무나 견고해서 아무나 차지하도록 놔둘 수도 없었다. 하늘보루를 차지한 군사 집단은 심문회가 처음이 아니었고, 다음 주인은 심문회만큼 이타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에 하늘보루는 보존하되 무력화하기로 결정되었다. 모두가 심문관이 테다스 사람들을 규합해 거짓 신에 맞섰던 때를 기억할 수 있도록, 이곳은 그저 아득한 봉화로만 남을 터였다.
서덜랜드와 일행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심문관과 함께 일어났다. 이제 그때의 결의는 텅 빈 메아리로만 계곡에 남았을 뿐이었다.
“찍찍이 없이 들어가려니 예감이 좋지 않은데.” 셰이드가 말했다.
“계획대로만 하는 거야.” 서덜랜드가 답했다. 하늘보루 조사 명령이 하달된 즉시 나서긴 했지만, 서덜랜드는 직접적인 행동은 피해 일부러 퍼렐던과 올레이를 이리저리 에둘러 온 참이었다. 마지막 구간에서는 일행을 나누기도 했다. 자신과 셰이드, 보스가 요란한 티를 내며 하늘보루로 직행하는 사이, 서덜랜드의 드워프 종자인 찍찍이는 지시에 따라 뒤에 머무르기로.
“그래.” 셰이드가 말했다. “이곳도 우리를 느낄 테니까.”
하늘보루는 계곡 사이, 높은 절벽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 형세는 마치 산 자체가 그 성벽을 오르려다 실패하고 무너져 내린 것만 같았다. 보통 때라면 승강기로 사람과 사역 동물들을 계곡 바닥에서부터 올려보냈을 것이지만, 요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일행은 망루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그 앞에는 기나긴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관리들은 심문회가 서서히 흐려져 사라지리라고 장담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혹여 심문회의 잔존 자산이 골칫거리가 되기라도 한다면 심문회의 유산을 둘러싸고 다시금 두려움과 분쟁이 일 것이었다. 하늘보루는 지루하고 안전한 곳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관리인이 마지막으로 보낸 보고서에는 프레스코화를 복원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두서없이 쓰여 있었다. 그런 일은 관리인의 의무가 아닌데도. 모든 것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어야 하는 물자 상단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하늘보루가 또다시 문제가 된 것이었다.
서덜랜드와 친구들이 문제의 대응책이었다. 유일한 대응책. 그럼에도 서덜랜드는 과연 그런지를 수상쩍어했다. 자신들은 하늘보루에서 복무한 이력이 있고, 이 일을 은밀하게 수행할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진정으로 위험한 일인 경우, 그들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만큼 규모가 작은 집단이기도 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어째서 유수의 군대의 공격에도 굳건히 버틴 요새에 자그마한 부대 하나만을 보낸단 말인가?
하지만 서덜랜드는 목적을 갖고 돌아왔다. 그는 하늘보루에서 보낸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심문회의 유산을 지키는 데 실패”함으로써 처음으로 후회할 일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찍찍이가 잘 따라와 주기만 한다면, 일행은 계획에 따를 것이었다.
“여전히 악마의 소행일 거로 생각해?” 셰이드가 물었다. 계단을 오르는 사이 죔쇠를 죄는 참이었다. 그 손길에 미늘 소재와 비단을 써서 지은 튜닉 위로 경화된 가죽 보호대가 단단히 메어졌다.
보스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다른 어딘가에서 벌어진 일이었더라면 일행도 딱히 빙의를 최우선으로 우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늘보루는 비범한 곳이었다. 그곳은 필멸자와 영의 세상을 갈라놓는 경계, 장막이 매우 엷었다. 마치 물결이 돌을 만나면 굽이치듯, 하늘보루는 여러 사건에 반응해 파문을 일으켰다.
계단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서덜랜드는 관리인의 마지막 보고서 말미의 글귀를 되풀이해 한 마디씩 읊었다. “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란 내용이었다. “무슨 실수를 말하는 걸까?”
영이란 대단히 독특한 존재였다. 감정에 이끌린다는 것이 필멸자와 같기는 하지만, 이들은 유별날 정도로 감정을 체현했다. 영이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어떠한 신호를 주는 일, 내지는 공격적인 행위일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존속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필멸자가 연민을 갖고 행동하는 것과 영이 연민으로서 행동하는 것은 무척이나 달랐다. 악마의 경우 또 다른 성질을 지녔다. 악마는 감정을 더욱 내향적으로 파고들며, 그것을 보다 거세게 갈구했다. 감정이 자신의 기호대로 역동하는 것을 보고자 타인을 조종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악마는 영보다 더욱 시기심이 강했고, 굶주렸으며 또한 더 위험했다.
실수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법이었다. 서덜랜드와 친구들은 나름대로 실수의 가능성을 헤아려 보고 최선을 다해 대비하고자 했다. 이 오르막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그 준비가 얼마나 적절했는지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사방이 탁 트여 있어.” 셰이드가 말했다.
세 사람은 조심스레 망루 바깥을 살폈다. 요새 본진과 다름없이 두터운 석재로 지어지기는 했지만, 망루는 그와는 외따로 존재했다. 마치 마지막으로 경고를 전하기라도 하는 듯이. 망루와 관문을 잇는 다리, 그러니까 “목” 부분은 견고하지만, 의도적으로 노출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는 방문객에게는 환대하는 듯한 풍경을 빚어 보였으며, 귀족들이 열병식을 거행하기에 적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진짜 목적은 대형 쇠뇌 사용 시 목표물 지정을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탑과 관문 사이에 엄폐물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늘보루의 “목”에 들어선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의 숨통을 취약하게 드러내어 보이는 일이었다.
셰이드는 관문 양쪽의 비교적 높이가 낮은 흉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끔 저기 앉아 있곤 했어.” 감흥에 젖은 듯 셰이드는 말을 이어갔다. “성곽에서 올라갈 수 있는 딱 알맞은 통로가 하나 있었거든. 거기서 모두를 지켜볼 수 있었지.” 셰이드는 잠시 그 자리에 올라선 자기 모습을 그리는 듯하더니, 지금은 누가, 혹은 무엇이 그곳을 꿰찼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서덜랜드는 눈에 띄는 명백한 위협이 있기를 바랐지만, 요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관문의 도개교도 내려져 있었다. 마치 초대하는 듯이, 혹은 덤벼 보라는 듯이, 하늘보루는 활짝 열려 있었다. 서덜랜드는 망루 한편에 배낭을 내려놓은 다음, 그 위에 여행용 망토를 덮어 둔 채로 승강기의 밧줄을 살펴보았다.
승강기를 내린 흔적은 없었지만, 기능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서덜랜드는 지지대 하나를 신중하게 두들겨 보았다. 이내 칼집을 헐렁히 한 다음 정강이받이를 단단히 조이고, 크게 심호흡한 뒤 승강기를 내리는 데 쓰이는 지렛대를 힘주어 젖혔다.
육중한 무게추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자, 서덜랜드는 거침없이 “목”의 돌바닥 위로 발을 내디뎠다.
“천천히 가, 바보야!” 셰이드가 서덜랜드의 어깨를 붙들며 말했다.
요새는 잠잠했다. 쇠뇌살이 잔뜩 날아들어 꼬챙이로 만들어버리는 일도 없었다. 서덜랜드는 몸을 돌려 두 팔을 쭉 뻗은 채로 웃음을 지었다.
“만약 정말로 악마라면, 우리가 온 걸 감지할 거야. 게다가…” 서덜랜드가 관문 너머, 중앙 성채와 그 내부의 원형 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놈이 어디 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잖아.”
안뜰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성벽은 겉으로만 위협적인 풍모를 띠었을 뿐, 그 안은 비어 있었다. 관문 아래의 화로는 침입자를 격자문 사이에 가두고 태워 버릴 목적으로 배치된 것이었지만, 지금은 계곡에 있던 화로와 마찬가지로 차게 식어 있었다. 가장 생경한 건 중앙 안뜰이었다. 전령들이 중앙 성채로 이어지는 석재 경사로를 오르내리느라 언제나 붐비는 듯 느껴졌던 곳이, 이제는 답답할 정도로 조용했다. 수백 명의 사람을 위해 지어진 요새가 텅 비니, 이제는 공허한 무게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서덜랜드는 웃음을 지었다. 도무지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이, 모든 게 익숙하고 경쾌한 느낌이었다.
서덜랜드는 일생을 농부로 살았다. 어쩌면 농부의 아들에만 머물렀다고 하는 게 정확한지도 몰랐다. 도적 떼가 가족을 살던 곳에서 내쫓겠다고 협박했을 때, 서덜랜드는 달아났다. 그렇지만 숨기 위해 그런 게 아니었다. 서덜랜드는 심문회 순찰대를 찾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정찰대는 서덜랜드의 곤경을 현지 문제라고 하면서도, 본인이 직접 하늘보루까지 가서 사령관께 호소해 볼 수는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정찰대는 모두에게 같은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누구도 정말 그렇게 해 볼 시도는 하지 않은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서덜랜드는 정말 그렇게 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하찮아 보이는 행색을 한 탓에, 손쉽게 보급 행렬에 섞여 관문을 지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덜랜드는 주점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말을 한들 상대방이 들어줄 이유가 있는지를 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채로.
지금, 서덜랜드는 전령의 쉼터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자신이 구한 농지의 가격보다도 더 비싼 방어구를 걸치고 있었다. 심문관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다. 셰이드에게, 보스에게, 찍찍이에게. 모험 부대원들은 분명 금전적으로는 자신이 입은 은혜를 (이자까지 쳐서) 갚았지만, 서덜랜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생각하곤 했다. 자기 친구들, 자신의 성채, 자신을 “경”이라고 높여 부르는 사람들까지, 삶의 좋은 것 모두가 한 곳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한 사람에게 빚진 것이었으니까. 한 번의 방향 전환 덕분이었으니까.
서덜랜드는 창문 사이로 어두컴컴한 주점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난롯가가 텅 비어 냉기가 감도는 것을 생각하자, 문득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는 반드시 그러겠노라고, 스스로 맹세했다.
찍찍이가 잘 따라와 주기만 한다면, 계획대로 하는 거야.
“도널?”
셰이드가 서덜랜드를 바라보았다. 서덜랜드가 생각에 잠겨 버릴 때면 언제나 그러곤 했다.
“나 어디 안 갔어.” 서덜랜드가 대답했다.
“관리인도 그래.”
관문에서 빠져나왔을 때, 서덜랜드는 거의 반사적으로 왼쪽에 눈길을 주었다. 주점이 위치한 안뜰 상층이 그쪽이었으니까. 반면 셰이드가 가리키는 방향은 오른쪽이었다. 둥그스름한 까마귀장 아래, 비어 있는 상인 가판대를 지나친 곳에, 시신이 한 구 있었다.
하늘보루의 관리인은 세심하게 선택된 사람이었다. 성가회 소속 수사이며, 먼 친척 외에는 연고가 없고 그리 유명한 인물도 아니었다. 관리인은 기나긴 순례를, 그리고 따분하지만 중요한 업무를 기꺼이 받아들인 인내심 크고 온화한 스승이었다.
그 견실한 사람이 마구간에 못박인 채 죽어 있었다.
서덜랜드와 셰이드, 보스는 각자 칼을 뽑아 들고, 화살을 메기고, 지팡이에 수호물을 준비해 가까이 다가갔다.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심지어는 저 위의 성벽에 걸린 깃발들도 나부끼지 않았다. 하늘보루 폐쇄 이후 마구간은 정기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탓에, 너무나 깨끗해서 마구간이라기보다 마치 마필 관리법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모형 전시장 같기도 했다. 마구간 문에 반쯤 서서, 왼쪽 팔의 손목 바로 아래에 큰 못이 박힌 관리인의 몸뚱이만 제외하고 본다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창조주 맙소사.” 서덜랜드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처참한 꼴을 조금이라도 덜 보기 위해서였다.
“죽은 지 적어도 일주일은 넘었어.” 셰이드가 말했다. “눈빛을 보면 알아.” 셰이드가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자, 그 짙은 피부색에 시신의 핏기 없는 모습이 더욱 돋보였다. “온몸의 피가 다 빠졌고.”
“그렇지만 과다 출혈로 죽은 건 아니야.” 보스가 말뚝을 가리키며 말했다. 팔 부위에는 혈액이 충분치 않았고, 관리인은 구부정하게 서 있었던 탓에 상처는 심장 위에 있었다. 그것 때문에 죽었을 가능성은 있다 해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온몸의 피가 빠질 리는 없었다.
“맞아. 여기 박혀 있기는 했지만…” 셰이드가 관리인의 망토를 젖히자, 복부에 난 깊은 상처가 드러났다. 피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어 있었지만, 관리인이 걸친 붉은색 성가회 로브 때문에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졌다. “쥐새끼를 잡아 피를 뺀 것 같은 꼴이야.” 셰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 서덜랜드가 말했다.
“악랄하긴 하지만, 말은 되잖아.” 셰이드가 몸을 돌려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니까.” 서덜랜드가 말했다. “이걸 봐.”
관리인은 왼팔로 매달려 있었다. 서덜랜드는 남자의 오른팔 쪽을 가리켰다. 거기, 피 묻은 망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관리인이 쥐고 있던 것이 힘이 빠지는 바람에 떨어졌을 법한 곳이었다.
“이런, 젠장." 셰이드가 재빨리 물러서며 말했다.
보스는 걱정스러운 듯이 머리를 문질렀다. “자기 몸을 못으로 붙박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거야…”
“그런 다음 뭔가가 이 사람한테 다가왔어.” 서덜랜드가 주의 깊게 안뜰을 살펴보며 말했다.
“악마네.” 셰이드가 경멸스러운 어투로 내뱉었다.
“악마들은 사람을 홀리고 혼란스럽게 만들지.” 보스가 말했다. “어쩌면 우리 친구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단 걸 깨달은 건지도 몰라.” 보스가 말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자신을 이용할 수 없게 만든 거고.”
“딱히 반가운 말이 못 되네.” 셰이드가 말했다. “뭘 그렇게나 피하고 싶었길래 자기 팔뚝을 벽에다 붙박을 정도란 말이야?”
“손톱!” 보스는 갑작스레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보스는 셰이드를 옆으로 물러나게 한 다음, 작은 칼을 꺼내 관리인의 손가락 끝을 찔렀다. 손끝은 관리인의 얼굴만큼이나 창백했지만, 끝부분이 이상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보스는 검지 손톱 밑을 살짝 파내, 알아낸 것을 동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게 뭐야?” 셰이드가 여러 색깔로 뒤죽박죽이 된 덩어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료와 회반죽이야.” 보스가 대답했다.
서덜랜드는 잽싸게 뒤를 돌아보았다. “관리인은 원형 방에서 일주일을 보냈다고 했지.” 성가회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프레스코화를 어떻게든 ‘복원’할 생각으로 말이야. 그건 자기가 맡은 일이 아닌데도.”
“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셰이드가 관리인의 마지막 말로 끝을 맺었다.
악마는 결코 하찮은 상대가 아니었다. 대항하는 방법을 알려면 먼저 어떤 종류의 악마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그래야 누가 맞설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오만한 이는 “교만”의 힘에 무너질 것이었다. 갈망하는 자는 저도 모르게 “욕망”의 손에 넘어가고 말 것이었고, 부주의하게 “분노”를 지피는 자는 거기 삼켜질 터였다. 실수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서덜랜드 일행이 예상할 수 있는 바는 한정되어 있었다.
서덜랜드는 조심스럽게 관리인의 팔에서 말뚝을 뽑아, 시신을 마구간 바닥에 눕힌 다음 담요로 덮어 주었다. 보스는 혈마법에 시신이 조종당하는 것을 막을 수호물을 배치해 두었다.
“그런 조치가 꼭 필요해?” 셰이드가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는 낌새였다.
“해로울 건 없지.” 보스가 말했다.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세 사람은 다시 관문을 지나 서쪽의 상층 안뜰로 향했다. 외곽의 나머지 건물은 모두 마구간과 마찬가지로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상인 가판대는 오지 않을 상품을 기다렸고, 주 전당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과거 수천 명 사람들이 심문관을 접견하고자 몰려들었음에도, 마치 사람 발걸음이라고는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듯 깨끗했다. 나무 골조를 기틀로 지어진 주점과 대장간도 서덜랜드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달리 휑하니 비어 있었다. 심문회가 해산될 때, 많은 구성원이 하늘보루 물건을 기념품 삼아 갖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꾼 곳을 그냥 훌쩍 떠나기를 원치 않았으니까. 남은 가구는 전시용으로 놓인 것이었는데, 의자는 완전히 탁자 밑에 수납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군가 막 일어난 듯이 비스듬히 놓인 것도 아니었다. 마치 그 중간 어딘가, 보이지 않는 지휘관이 여전히 앉아 있다가 전령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것을 포착한 듯했다. 정말로 이곳에서 생생히 살아간 이들이 아니라, 보존을 담당한 이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정물화 같은 광경이었다.
“다른 시신은 보이지 않아.” 서덜랜드가 말했다. “실종자는 몇 명이지?”
“여기 머무르는 직원은 일곱 명이었어.” 셰이드가 요새 기록 책자를 넘기며 말했다. “보급 상단에 열 명이 더 있었고.”
“그중에도 노련한 싸움꾼이 여럿 있었는데.” 서덜랜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보스? 뭐 건진 거 없어?”
“악마는 관리인을 잡지 못하다가, 어째선지 갑자기 그럴 수 있게 됐어. 발톱이나 송곳니를 지녔고.”
“그걸로는… 부족한데.” 셰이드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음유시인이라면 적을 철저하게 파악하고자 하기 마련이었다.
서덜랜드는 경계하며 중앙 성채의 발코니를, 그리고 원형 방의 창문을 살폈다. “얼마나 남은 거야…?”
“놈이 우리한테 들이닥치려면? 때에 따라 다르지.”
“보스.” 부아가 치민 듯한 어조로 셰이드가 말했다.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소릴 해봐.”
“보고서를 통해 짐작한 대로, 놈은 원형 방에서 출몰했을 거야. 놈이 굶주린 상태이고 우리가 놈에게 필요한 감정을 내뿜는다면, 자기 내킬 때 나타날 거고.”
갑작스레 관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목” 근처의 망루에서 승강기의 무게추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단상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기다릴 수만은 없어.” 서덜랜드가 말했다. “놈도 분명 우리를 느낄 거야.”
“어쩌면 여기 오면 안 되는 건지도.” 셰이드가 말했다.
셰이드의 말은 갑작스레 몰아친 돌풍에 중앙 성채의 문이 열리고, 큰 소리가 난 탓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돌풍은 성채의 석벽으로 잦아들었고, 그 김에 남은 울림은 마치 울부짖는 소리로 변하는 듯했다. 세 사람은 놀란 기색으로 서로를 돌아보고는, 무엇이 나타나든 맞설 준비를 하고 그쪽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 사람은 무기를 뽑아 들고, 문으로 이어지는 경사로에 서서 초조히 기다렸다.
“이 소리 들려?” 서덜랜드가 새된 소리로 속삭였다.
“뭐 말이야?” 셰이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서덜랜드는 경사로를 올라, 조심스럽게 대전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뒤로는 나뭇잎 한 장 미동하지 않았고, 드물게도 이 고도에서 자라는 화초의 꿀을 따려 부산히 움직이는 곤충도 없었다. 흉벽에 걸린 깃발에도 특이한 기색이 없었다. 그보다 깃발은 어떤 바람도 받지 않았다. 모든 게 완벽하게 정지해 있었다. 점점 오싹해지는 한기만 감돌 뿐이었다.
“펜히디스!” 보스가 침묵을 깨고 엘프어 욕을 내뱉었다. 보스는 숙달되었지만 긴장된 동작으로 손을 움직였고, 이내 그 손가락과 옹이진 심목 지팡이 사이에는 에너지 가닥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장막의 파동에 집중하는 채로 몸을 돌렸다.
“악마가 확실해.” 보스가 안간힘을 주며 말했다. “뭔가가 놈의 주의를 끌었어.”
“놈이 공격할까?” 셰이드가 물었다. 셰이드는 보스의 지팡이를 숙여 안뜰의 유리한 지점을 샅샅이 주시하려 애썼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놈은—” 보스는 몸을 돌리는 것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보스가 눈을 뜨고 주문 시전을 중단하자 에너지는 파지직거리며 사라졌다. 보스의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다. “놈의 이름을 알아내려 했지만, 움직이는 게 너무 빨랐어.”
“놈만 있는 게 아니야.” 서덜랜드가 경사로 아래로 돌아가며 말했다. 왼손에는 관리인의 시신에 덮어 주었던 담요가 들려 있었다.
“이게 전당에 있었어.” 서덜랜드가 말했다.
“펜히디스.” 셰이드가 낮게 말했다.
서덜랜드는 담요를 떨어뜨리고는 친구들 뒤를, 하늘보루의 “목” 너머를 바라보았다. 승강기가 이제 망루 꼭대기로 거의 다 올라온 참이었다.
“좋아.” 서덜랜드가 마음을 가다듬고, 한쪽 팔의 완갑을 단단히 여미며 말했다. “우리가 이 자식의 이목을 끌 짓을 한 모양이야. 계속해서 눈길을 끌자고. 그래야—” 서덜랜드가 말을 멈추었다.
셰이드가 팔짱을 낀 채로 서덜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이 난 게 분명했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어.” 서덜랜드가 부탁한다는 듯이 셰이드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느껴야 한다고.”
하늘보루는 천 년 가까운 세월을 버틴 곳이었다. 알맞은 주인만 만난다면 남부 테다스 전역에 군대를 내보낼 수도 있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란 말이 어울리는 요새였다. 하늘보루에는 요새가 갖춰야 할 모든 게 마련되어 있었지만, 한 가지 별난 구석이 딸려 있기도 했다. 바로 원형 방의 프레스코화였다.
“그걸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셰이드가 물었다.
일행은 안뜰에서 나와 대전당으로, 그리고 내실이 빼곡히 들어선 좁은 복도로 향하고 있었다. 방문은 모두 열려 있었지만, 신중하게 움직이느라 모든 문의 잠금장치를 하나하나 풀고 지나가는 듯이 진전 속도가 느렸다.
“심문관님이 미살의 사원에서 돌아오신 직후야.” 서덜랜드가 외경심을 품은 듯한 어조로 말했다. “고대 엘프가 그려진 부분 말이야.”
“내가 듣기로는 한 부분이 더 있었다던데.” 셰이드가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코리피우스에게 거둔 승리에 관한 내용이었을 거라고.”
“그것까지 볼 기회는 없었어.” 서덜랜드가 웃음을 띠고 셰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일찍 떠나야 했던 거 알잖아. ‘북적이는 거 피하자’고 한 게 너였다고.”
“우리만의 요새란 거저 생기는 게 아니니까.” 셰이드가 다정한 눈짓을 보내며 서덜랜드의 말을 받았다. 하늘보루를 떠나는 건 모두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알아. 난 그저—” 서덜랜드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손을 들어 일행에게 주의를 주었다. 마치 속삭이는 듯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원형 방이 코앞에 있었지만,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심상치가 않았다. 마치 영계 균열 근처에서나 보일 법한 녹색 빛깔이었다. 하늘보루의 장막이 그렇게나 엷고, 그렇게나 손상된 상태라면 악마가 건너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지만 정확히 어떤 악마지? 어떤 실수에 이끌려 이곳까지 온 것일까?
서덜랜드는 일행을 향해 몸을 돌렸다. 보스는 빛을 발하는 지팡이로 방어용 수호물을 자아내고 있었다. 셰이드는 활 대신 근접전용 무기로 톱날 단검 한 쌍을 들었다. 단검은 모종의 액체로 적셔져 있었지만, 서덜랜드는 그 용액이 무엇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는 편이 현명하단 것을 알고 있었다. 서덜랜드는 장검을 꼭 붙들고 나머지 일행에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원형 방으로 들어섰다.
원형 방은 삼 층 높이는 족히 더 될 석실이었다. 그 저부와 도서실로 쓰인 고리 모양 층계는 중앙 성채와 이어져 있었다. 꼭대기는 까마득히 높아서, 거기 올라 지상층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거기에는 새장이 있었다. 요새치고는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희한했다. 셰이드는 그곳에는 비밀을 숨길 만한 모퉁이가 없어서 중요한 회담에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원래 용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가운데가 비어 있는 탑은 프레스코화로 유명해졌다. 여덟 개로 분할된 판이 방을 빙 둘러 놓여 있었고, 그 모두는 높이가 6미터에 달했다. 그곳에는 심문관의 모든 행적이 회반죽 그림으로 기록되었다. 전령의 출현을 알린 대폭발부터, 대재앙에 오염된 거짓 신을 상대로 거둔 승리까지. 모두 심문회의 장막과 영계 분야 전문가, 솔라스란 자가 그린 것이었다. 이 프레스코화는 솔라스가 기록으로 남겨 건네는 선물과도 같았다. 적어도, 당시에는 모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일행이 들어선 원형 방은 하늘보루의 나머지 부분처럼 말끔하지 않았다. 바닥에는 끈적이는 피가 갈변되어 남은, 보기 흉한 얼룩이 잔뜩 있었다. 한때 통신에 쓰이던 새들이 살던 우리에는 온갖 토막 난 신체 부위가 가득해 묵직했다. 썩어가는 사지에서 이따금 잔여물이 떨어지기도 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책상이 하나 있었다. 심문관과 솔라스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고관대작이 거쳐 간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기에는 누군가 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한 구의 시신이었다.
“관리인이야.” 보스가 숨죽인 채로 시신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보스는 최대한 말소리를 낮추려 했지만, 그럼에도 말소리는 떠돌며 변하기 시작했다. 끝내 그 소리는 방에서 나던 소음과 합쳐진 끝에, 일행이 바깥에서 들은 낮은 소리가 되어 내벽을 타고 울렸다.
“회벽.” 셰이드가 말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프레스코화는 벽에서 스스로 깊이를 얻는 듯했다. 겹겹이 덧칠된 회반죽이 갈라지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야말로 무언의 속삭임이었다. 처음에는 미묘할 뿐이었다. 첫 번째 판석에서 칠흑 같은 그림자가 그림 속 대균열 뒤로, 전령을 전령으로 만든 폭발 사이로 움직였다. 두 번째 판석에는 심문회의 창건 일화가 그 상징을 통해 묘사되어 있었다. 곧은 대검을 감싼 안드라스테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서 붉은 안료가 흘러내려 회색 칼날 아래로 떨어졌다. 심문회의 표상을 지키는 두 마리 늑대의 세밀화는 검은 형체가 더 나타나자 빛을 잃고 바스러지고 말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성채의 문을 열어젖힌 것과 같은 강풍이었다. 하지만 이번 바람은 문과 각종 집기를 성 안으로 끌어당겼고, 그 김에 잡동사니가 원형 방 입구에 잔뜩 처박히고 말았다.
“이런 개 같은—” 셰이드가 몸을 날려 나가는 통로를 틀어막은 잔해를 밀어 보았지만, 잔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스가 가세해 지팡이를 지렛대로 써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셰이드는 서덜랜드를 바라보았다. “어서 힘줘서 밀어!”
서덜랜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걸 어떻게 하지 않고서는 거기로 못 나가.” 서덜랜드는 프레스코화 사이를 누비는 검은 형체를 가리켰다.
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셰이드는 분에 찬 듯 울부짖으며 잡동사니를 한 번 더 발길질해 보고는, 다시금 단검을 꺼내 들었다.
회반죽과 그림자가 엉긴 형체는 세 번째 판석의 안료를 빨아들이며 계속 자라나고 있었다. 헤이븐이 파괴되기 전에 거둔 짧은 승리가 기록된 그림이었다. 그림자는 곧 거짓 신 코리피우스가 그려진 부분으로 옮겨가, 마치 늑대들을 그리했듯 빛깔을 흡수했다. 코리피우스가 과거에는 그토록 두려운 존재였다는 사실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심문회를 빚어낸 모든 사건은 색채를 빼앗기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은 마치 수레에 실린 도자기 그릇이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내듯,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세 사람은 몸을 돌려 가며 그림자를 눈으로 좇고 다음 움직임을 예측했다. 그 목적은 하나였다.
“여덟 번째 판석이야.” 보스가 말했다.
프레스코화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판석에는 본디 대재앙에 물든 매지스터, 코리피우스에게 맞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이 그려져야 했다. 그렇지만 이는 완성되지 못했고, 그 거친 밑그림의 빈 곳에는 이제 방 곳곳을 누비던 색채의 덩어리가 채워지고 있었다. 끝내 그림은 세부적인 부분까지 완성되고 깊이감을 얻었지만,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했다.
“저건… 내가 예상한 거랑은 다른데.” 서덜랜드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그 일화는 이미 유명했다. 고대의 존재, 거짓 신 코리피우스는 하늘에 구멍을 뚫고 천상의 힘을 훔치려 했다. 놈이 거느린 대재앙에 물든 용이 죽지 않는 한, 코리피우스 역시 불사의 존재였다. 하지만 안드라스테의 전령, 심문관도 모종의 수단으로 용을 부려 거기 맞섰다. 판석에도 과연 용이 그려져 있었고, 그 목에는 심문회의 검이 꽂혀 있었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에 의하면 먼저 쓰러진 것은 코리피우스와 그 사룡이었다. 최후의 승리자는 심문관이어야 했다.
그렇지만, 여덟 번째 판석에는 용과 심문회의 검 모두를 지켜보는 짐승의 형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 그림은 전투를 그린 것도, 승리의 일화를 그린 것도 아니었다. 바로 그 이후를 그린 것이었다. 하물며 그림 속 짐승은 용이 아니었다. 외곽선만 본다면 용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검고 붉은 색채로 물든 지금은 그게 아닌 다른 무엇을 그렸다는 게 분명했다. 괴수는 파충류 같으면서 갯과 짐승 같기도 했다. 뭉툭하고 이빨이 삐죽삐죽한 주둥이를 지녔으나 귀는 마치 사냥개 같았다. 이내 회반죽 덩어리가 마저 채워지자 그림은 일어나 비늘과 꼬리, 앞발과 갈퀴 발톱이 모두 달린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유리판의 양면에 서로 다른 형체를 그린 다음 하나로 바라보는 것처럼, 그 모습은 혼란스러웠다. 용을 흡수한 듯한 늑대가 모두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쩌적 소리와 함께, 형체는 승리의 그림에서 떨어져 나왔다. 갑작스레 온전하고 위압적인 괴수가 물리적 존재감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었다. 괴수는 몸을 돌려 서덜랜드 일행을 쳐다보았다.
“눈이 너무 많잖아.” 셰이드가 단검을 투척할 자세를 갖춘 채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셰이드는 멈추었다.
“셰이드?” 서덜랜드가 말했다. 셰이드가 안전한지 알아야 했다. 그렇지만 프레스코화에서 형상을 갖춘 괴수로부터 눈을 돌리는 위험은 감수할 수 없었다.
셰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덜랜드 왼쪽에 있던 보스는 주문을 준비했다. 시전하는 것을 느끼기만 해도 뼈저리게 아픈 주문을.
그러다 보스도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 잠잠해졌다.
서덜랜드는 악마와 얼어붙은 두 친구 사이에 버티고 서려 했다. 방을 훑어보며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았지만, 책상과 관리인의 시신 외에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출입구는 세 곳이었다. 일행이 사용한 통로. 바깥으로 이어지는 한 곳. 그리고 내벽을 감돌며 위로 이어지는 나선 계단. 그 모두가 막혀 있었다. 서덜랜드는 까마귀장이 있는 상층을 바라보았지만, 벽을 타고 올라갈 수는 없었다. 바깥은 보이지 않았으나 창문에서 비친 빛줄기가 금속 우리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거기서 뭔가가 움직였다. 원형 방 가장자리 너머로.
아직은 아니야, 하고 서덜랜드는 소리 없이 읊조렸다. 악마의 주의를 끌어야 했다. 놈이 자신을 느끼게끔.
서덜랜드는 흉갑에 대고 검을 부딪쳐 큰 소리를 낸 다음, 검을 치켜들어 앞세웠다. 그러고는 괴수의 수많은 눈을 바라보며, 자기 친구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능한 한 놈에게 위협적으로 비치게끔 두었다.
“괴물 놈아!” 서덜랜드가 내뱉었다. “네 이름과 네가 저지른 죄를 고해라!” 다른 때였더라면 서덜랜드도 무척 강건해 보였을 테지만, 지금은 영 그러지 못했다.
괴수는 그저 묵묵히 서덜랜드를 바라만 보는가 싶더니, 일순간 그 회반죽 입술에 급격히 웃음이 번졌다.
“나는 여기 있던 것의 심장이다.” 그 말과 동시에, 놈은 세 개의 팔 중 하나로 프레스코 판석을 차례대로 가리켜 보였다. “영계를 파고든 메아리이자,” 괴수는 서덜랜드의 친구들을 가리켰다. “가장 용맹한 칼잡이와 마법사조차 멎게 하는 존재다.”
괴수가 사지를 제 겹겹의 몸뚱이 사이로 집어넣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놈은 판석보다도 훨씬 거대한 몸을 일으켜, 벽에서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노호하며 제 이름을 외쳤다.
“나는 후회다!”
셰이드는 더는 원형 방에 있지 않았다. 무시무시하고 존중받는 음유시인으로서 단검을 치켜들었지만, 손을 내리자 데일스 끝자락의 골목을 달리는 열네 살짜리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어떤 모진 말을 할지도 이미 알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의 목소리였으니까.
“넌 아무것도 되지 못해!” 셰이드가 소리를 질렀다. 돌아설 수가 없었다. 이 순간에 셰이드는 정말로 그럴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넌 아무것도 되지 못해!”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이, 단지 남에게 기대 살며 바람을 품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자신에 대한 미움이 외치는 소리였다.
그 뒤의 먼 곳에서는 어머니가 셰이드의 진짜 이름을 울부짖었다.
보스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보스는 이런 데 미숙했다. 추적 기술을 갈고닦고, 매듭 묶는 법을 연습하기보다는 책에만 빠져 살았다. 앞길은 탁 트여 있었다. 보스는 가방과 지도를 챙겨 발 어쩌고 하는 대도시로 나갈 것이었다. 말은 거의 하지 않을 속셈이었다. 한 번 입을 열면 사연을 설명해야 하니까.
그 뒤의 먼 곳에서는 밧줄에 휘감긴 곰이 형제를 박살 내 피와 흙먼지로 만들어버렸다.
악마가 움직이자 원형 방에는 회반죽이 흘러넘쳤다. 이 괴수는 매 걸음마다 제 형상을 다시 빚는 듯했다. 놈은 서덜랜드와 굳어버린 친구들 위에 군림했다. 그 거친 목소리는 메마르고 쓰라렸다.
“여기에는 내가 정말 많다.” 악마가 말했다. 세 사람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숱한 위업 뒤에 후회가 잔뜩 서려 있지.” 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이 여덟 번째 판석에 낸 구멍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과연 다가오는 공포를 알았을까?” 그 순간 후회는 무언가를 강하게 탐내는 것만 같았다. 축일 전날 밤, 약속받은 사탕을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놈은 웃음을 지으며 서덜랜드에게 다가갔다.
서덜랜드는 거리를 좁혀 오는 놈을 곧장 검으로 깊이 찌를 생각이었다. 놈이 뒤집어쓴 형체의 먼지 섞인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서덜랜드는 가만히 멈춰 섰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로 세상에는 상처가 남았다.” 후회가 셰이드와 보스를 향해 팔을 뻗으며 말했다. “너희 모두 상승을 목도하고 추락을 느꼈다.” 세 번째 팔이 서덜랜드의 머리를 감싸 투구를 벗겨낸 다음, 마치 소중한 것 어루만지듯 쓸어내렸다. “왜 이제 와서 목숨까지 걸어가며 여기로 돌아왔느냐?”
서덜랜드는 미소를 지었다. 하늘보루에서 보낸 모든 하루가 최고의 나날이었음을 기억하자 웃음이 났다. 그리고 자신의 맹세를, 돌아온 이유를 떠올렸다.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었다.
“후회하지 않아.” 서덜랜드가 말했다.
괴수가 채 반응할 새도 없이 서덜랜드의 검이 놈의 가슴을 꿰뚫었다. 서덜랜드는 모든 힘을 칼자루에 실었다. 그 충격에 악마는 뒤로 밀려났고, 아직 쓰는 법을 다 익히지 못해 걸음이 서투른 다리로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서덜랜드가 검을 잡아뽑자 도신에는 물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후회는 책상으로 엎어져 관리인의 시신에 고꾸라졌다. 그 몸부림에 괴수와 시신의 형체가 뒤섞여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셰이드! 보스!” 서덜랜드가 고함을 질렀지만, 친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공격이 악마의 영향력을 뒤흔든 거라면 아직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서덜랜드는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도록 모아 자신이 지키기 쉽게 한 다음, 다시 검을 들고 준비했다. 운이 좋게도 여느 생명체라면 처치했을 만한 일격을 날리긴 했지만, 악마는 여느 생명체가 아니었다. 게다가 서덜랜드는 이미 너무 운에만 기대고 있었다.
후회가 부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놈의 형체는 벽이 없어도 뻗는 그림자처럼, 선 자세로 다시 빚어질 뿐이었다. 놈은 서덜랜드를 바라보았지만, 이번에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형상대로 늑대와 용의 울음소리, 그 사이의 어딘가 같은 소리를 사납게 내질렀다. 후회가 벽을 건드리자 회반죽이 더 많이 그 형체로 밀려들었다. 가슴에 난 상처는 그대로였지만, 이내 그 자리는 얼룩덜룩한 새로운 물질로 채워졌다.
서덜랜드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본 움직임이 또 있었다. 순간 가장자리에서 장갑을 낀 손이 불쑥 나타나 엄지를 위로 치켜들어 보였다. 서덜랜드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내 친구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서덜랜드가 다시금 크게 소리쳤다.
“녀석들은 저 자신 안에 잠겨 있다. 선택하던 과거의 순간에.” 후회가 수많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서덜랜드를 바라보았다. “너는 무엇이기에 저들과 다르지?”
서덜랜드가 괴수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다음 말을 천천히, 의도적으로 골랐다. “우린 여기서 악마를 찾을 거라 생각했다. 너 같은 건 예상 밖이었어.” 서덜랜드는 말을 멈추었다. “그렇지만 한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지.” 서덜랜드는 얼어붙은 친구들을 향해 과장된 몸짓을 지어 보였다. “보스는 누구도 시기하지 않아. 셰이드는 교만을 몇 번이고 쓰러뜨린 바 있어.” 서덜랜드는 악마를 단단히 주시했다. “나는 어떨 것 같아?”
서덜랜드는 오른편의 손상된 프레스코화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갔다. “네가 훔친 이 사건들. 나는 그걸 실제로 살아갔어. 여기, 하늘보루에서.” 서덜랜드는 반대쪽 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악마와 친구들 사이에 섰다. “넌 네가 이 그림 속 이야기에서 빚어진 줄 알지?” 서덜랜드는 판석을 가리켰다. 복잡하게 그려진 회색 감시자의 몰락 일화. 그 옆에는 황제의 운명에 대해서도 그려져 있었다. 서덜랜드는 퍼뜩 무언가 알아차린 듯 멈추었다. “나야말로 이 일들로 지금의 내가 됐어. 너보다 훨씬 전에.”
서덜랜드는 교만과 분노가 치밀도록 두었다. 지금 당장은 피해 다닐 필요가 없는 악마들이었다. 서덜랜드는 뒤로 물러나, 장갑 낀 손이 모습을 드러낸 반대쪽에 신중하게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 무엇도 후회하지 않아.” 서덜랜드가 말했다.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었다. 서덜랜드는 우뚝 버티고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너는 날 속이지 못해.”
후회는 사나운 소리를 내지르고는, 몸을 굽혀 관리인의 시신을 붙들었다. 마치 깃털처럼 가볍다는 듯이 가뿐하게. 보스가 시신에 배치해 둔 수호물이 충격을 일으켜 악마를 뒤흔들었다. 놈은 시신을 방 반대편으로 내던져 벽에 메다꽂았다. 귀에 거슬리는 쿵 소리가 났다.
“내 힘에 영향을 받지 않을 줄 아느냐?” 후회가 날카롭게 고함쳤다.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처럼 갈라진 목소리였다. “내 장난감을 갖고 갈 수 있을 줄 알아? 어디에 숨어도 내 의지를 피할 수는 없다!” 악마가 힘을 발휘하자 보스와 셰이드의 몸에는 경련이 일었다. 눈빛으로 봐서는 여전히 정신을 차린 기색이 아니었지만, 둘은 무기를 들어 올렸다.
“창조주 맙소사, 안 돼.” 서덜랜드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악마들이 어떻게 사람을 조종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같은 편끼리 서로 등을 돌리게 만드는 수법을. 관리인과 나머지 직원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 서덜랜드는 친구들을 해치기보다는, 차라리 벽에 자기 팔뚝을 못으로 붙박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후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의 후회는 오직 자라날 뿐이다!” 악마가 웃었다. “둘을 베면 너도 내 것이 되는 거다!” 놈의 손짓에 보스와 셰이드가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서덜랜드가 선 자리에 뭔가 끔찍한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후회는 기괴할 정도로 헤벌쭉 웃었다. “내가 이겼다는 걸 알 텐데. 이제는 어찌 대응할 테냐?”
“야, 이 너그박이야!” 갑자기 위에서 누군가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마는 울부짖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원형 방의 가장자리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쪽은 서덜랜드의 드워프 종자, 찍찍이였다. 투구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파리한 살갗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찍찍이는 제 몸집보다 세 배는 더 큰 용기 하나를 천으로 가린 채 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드워프가 한 사람 더 있었다. 짧은 흉갑과 기다란 대장장이 장갑을 낀 자였다. 희한한 얼굴 가리개인지, 투구인지 모를 물건을 머리띠로 묶어 고정한 사이로 중간 길이 정도의 빨간 머리가 보였다. 두 드워프 여자는 씩 웃었다.
“이렇게 대응하면 되지!” 전직 심문회 비전 장인, 다그나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이야!” 서덜랜드가 크게 소리 질렀다.
찍찍이가 곁에 끼고 있던 짐을 기울여 떨어뜨렸다. 커다란 유리 항아리였다. 그 안에서는 붕붕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고 노란 무언가가 성난 듯이 휘몰아쳤다.
서덜랜드는 친구들에게 달려들었다.
후회는 팔 두 개를 들어 떨어지는 용기를 공중에서 붙들었다. 놈은 이겼다고 생각하고 웃으며 위를 노려보았지만, 승리감에 젖기에는 너무 일렀다. 용기 바닥에 다그나가 새겨놓은 룬이 붉은빛을 발하자, 항아리는 산산이 깨졌다. 파편과 성난 곤충 떼가 악마의 얼굴에 달려들었다.
그다음에는 완전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서덜랜드의 일격은 후회의 집중을 살짝 흔드는 데 그쳤지만, 찍찍이가 던진 벌 떼는 그걸 완전히 박살 내놓았다. 악마는 요동치는 덩어리가 되어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몸부림쳤다. 원형 방의 출입구를 막고 있던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새장 몇 개도 추락해 책상에 부딪혀 박살이 났고, 그 김에 시체 사지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게 무슨—!” 정신을 차린 셰이드가 무르팍에 웬 토막 난 발 하나가 있는 걸 보고 소리 질렀다.
“돌아와서 다행이야!” 서덜랜드가 말을 마치고는 잽싸게 몸을 기울여 셰이드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셰이드는 눈을 감고 서덜랜드를 끌어안았다. 정말 진짜 서덜랜드가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듯이.
보스도 머리를 부여잡은 채 두 사람 뒤에서 일어났다. 후회는 벌 떼에 둘러싸여 사지와 눈을 이리저리 데굴거리며 혼비백산했다. 원형 방 꼭대기의 다그나는 번개 룬을 던져 댔다. 찍찍이는 책장을 난간 위로 넘어뜨렸고, 책장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괴물을 깔아뭉갰다. 서덜랜드와 셰이드는 열렬히 입맞추고 있었다. 바깥으로 향하는 출입구 두 곳이 뚫렸고, 프레스코화는 색을 잃고 있었다.
보스는 똑바로 선 다음 출구를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놈은 여기서 가장 강해져!” 보스는 여러 가지로 엉망진창이었지만,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며 고함쳤다. “녀석을 바깥으로 유인해!”
“뭐라고요?” 찍찍이가 의자를 던지려고 난간 위에 올리다 말고 고함쳤다.
“저걸 바깥으로 끌어내!” 서덜랜드가 고함쳤다. “거기서 집합하자!” 서덜랜드는 셰이드를 펄쩍 안아 들고는 보스를 따라갔다.
일행은 문까지 가닿지 못했다. 보스는 움찔하며 팔로 눈을 가렸다. 꼭 갑작스레 울창한 숲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후회가 다시 일어나 보스의 생각에 또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놈은 셰이드에게도 팔을 뻗었다. 셰이드는 성난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기 남아서 네 선택을 마주해라!” 후회가 거대한 몸집을 일으켰다. “나는 네가 저지른 짓 모두를 나타낸다! 너희는 내 의지에—”
악마의 머리에 의자 하나가 날아드는 바람에 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기사님한테서 손 떼!” 찍찍이가 고함쳤다.
악마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곳에는 너희 실수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무릎 꿇고 애원하면 내가—”
쿵! 의자가 또 하나 날아들어 놈의 말을 끊었다.
찍찍이는 악마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신이 남긴 후회다. 너희는—!"
직전에 날아든 의자에 부착된 룬이 악마의 발치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에베베베베!”
후회는 분노에 차 새된 소리를 내지른 다음, 벽에 팔을 붙박고 위로 기어갔다. 놈이 지나치는 자리마다 회반죽과 돌무더기가 후두두 떨어졌다.
“이런, 돌멩이 같은!” 찍찍이가 잽싸게 뒤돌아 중앙 성채로 이어지는 상층 복도로 향했다. 악마가 찍찍이를 쫓아가자, 전보다 더 큰 석재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다. 이내 놈은 원형 방 가장자리로 어기적거리며 모습을 감추었다.
“언사를 조심해야지.” 서덜랜드가 웃음 지으며 검을 주워들었다. 놈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보스가 서덜랜드를 멈추었다. “저기로 곧장 뒤쫓아갈 수는 없어.”
“놈이 찍찍이를 노리잖아.” 셰이드가 인상을 찌푸리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도 놈한테 갚아줘야 할 게 있고.”
다그나는 계단을 내려와 세 사람 사이에 끼는가 싶더니, 곧바로 프레스코화에 눈길을 빼앗겼다.
“놈은 우리 머릿속에 침투해.” 보스가 말했다. “놈의 시야에 들어서는 안 돼.”
“난 고작 사라져 버리려고 기껏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서덜랜드가 가슴팍을 두들기며 말했다.
서덜랜드는 짜증이 났다. 보스에게 짜증이 난 건 아니었다. 서덜랜드는 자신들이 실패를 염두에 두고 파견된 게 아닌지를 의심스러워했다. 하늘보루가 골칫덩어리라는 것만 확인되면, 사라져 잊히도록 둘 버리는 패. 그렇게 되면 관리들에게 심문회의 유산을 영원히 지워 버릴 빌미를 줄 것이었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계획이 있어요.” 서덜랜드가 다그나에게 손짓했다. “찍찍이가 다른 사람들도 데려왔으니까, 빠르게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서덜랜드는 악마가 난적이 될 것임은 예상했지만, 문제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증원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 같은 사람이 더 필요했다. 비밀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충직하고, 살짝 모습을 감추더라도 괜찮을 대수롭지 않은 이들이. 그래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았다. 하늘보루를 집으로 여겼던 사람들을. 그런 다음, 찍찍이에게는 뒤에 남아 있다가 자신이 악마를 산만하게 했을 때, 놈의 능력을 얼추 가늠했을 때 다함께 들이닥치라고 해 두었다. 그 모두가 힘을 합쳐 하늘보루를 되찾을 것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대응책이었다.
“지금 상황은 네 예상과는 다르잖아.” 보스가 말했다.
서덜랜드는 고개를 숙였다. 하늘보루에 있는 걸로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 꼭 옛날 그때처럼. 서덜랜드는 정말 그걸로 충분했는데.
서덜랜드는 다그나에게 물었다. “다들 저게 뭔지는 알아요?”
“아마 데너림 사람들까지도 저놈 소리를 들었을걸요. 정말 요란해요.” 다그나가 잠깐 멈추고는 다시 말했다. “벌 떼야 그렇다 치고, 우리도 정확히 뭘 하면 되는 건지 모르는 것 같아요.”
하늘보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서덜랜드는 친구들을 향해 돌아섰다. “내가 먼저 갈게.” 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일단은 저 바깥으로 나가야 해.”
“찍찍이는 어쩌고요?” 다그나가 물었다.
“찍찍이는 전령인걸요.” 서덜랜드가 말했다. “뛰어다니는 데는 도가 텄어요.”
찍찍이는 도서실을, 그다음에는 대전당 2층을 가로질러 내달린 끝에 정원 발코니로 나갔다. 네 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요새에 약초와 연금술 재료를 양껏 조달할 수 있을 만큼 넓기도 했지만, 그 주된 목적은 사람들이 묵상할 공간을 제공하고 인력의 사기를 증진하기 위함이었다. 그 양쪽으로는 중앙 성채가 어렴풋이 보이고, 두 층계에 걸쳐 수많은 문이 있었다. 동쪽에는, 그러니까 찍찍이가 있는 쪽에는 내려갈 계단이 없었다.
찍찍이 뒤편의 문이 갑자기 박살 났고, 후회가 그 몸뚱이를 끌고 햇볕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찍찍이는 정원 담벼락으로 뛰어올라 난간을 타고 나아갔다. 악마가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그 뒤를 쫓았다. 프레스코화와 멀어지고 나니, 놈은 전보다 더 조잡한 그림 같았다. 놈이 팔을 뻗었다.
“이런 돌멩이 같은.” 찍찍이가 말했다. 별안간 찍찍이는 지하 가도에 있었다. 나지막한 돌무지 뒤에 웅크린 채로. 주변이 깜깜해서 좋았다. 싫은 걸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소리가 들렸다.
“네 냄새가 나는구나, 조그만 것아.”
찍찍이는 머리를 푹 숙여 숨었다. 자신은 언제나 그랬다. 그러고는 도망치기만 했다.
그 뒤의 먼 곳에서는 어둠피조물의 발톱에 파라곤의 명맥이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저리 꺼지지 못할까, 이 꼴 보기 싫은 놈!” 갑자기 어느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독특한 억양과 노기가 짙게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러고는 망치 하나가 날아들더니 악마의 어깨(로 짐작되는 부위)에 명중했다. 놈의 일곱 다리 중 세 개가 나동그라졌고, 균형을 잃은 놈은 턱부터 정원 담벼락에 거세게 처박으며 넘어졌다. 놈은 성난 듯 버둥거렸지만, 붙잡을 것을 찾지 못하고 결국 정원으로 미끄러져 추락해 모습을 감추었다.
찍찍이는 눈을 깜빡이고는, 휘청이며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안뜰의 돌밭에 곤두박질칠까 봐 몸에 힘이 들어갔지만, 누군가 탄탄한 팔뚝으로 찍찍이를 붙들어 덩달아 쓰러지는 바람에 충격을 나눠 받을 수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쇼.” 말을 건넨 사람은 해릿이었다. 심문회의 전임 대장장이. 이제는 올레이 길드의 표식이 찍힌 가죽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만, 해릿은 크레스트우드와 거래하느라 마침 퍼렐던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 김에 찍찍이의 후발 부대로서 서덜랜드 일행에게 가세할 수 있었다.
해릿은 콧수염 사이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가, 곧 인상을 찡그렸다. 떨어지는 통에 무릎을 크게 삔 듯했다.
“이런—” 찍찍이가 말을 마칠 새도 없이 악마가 나타났다.
“조그만 것아!” 놈이 다른 편 벽을 기어오르며 울부짖었다.
찍찍이는 입을 가렸다.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일이 영 안 풀리는 모양이구먼?”
찍찍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게 날 좋아하지는 않네요.”
“지껄이는 꼴을 보니 애초에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 놈 같구먼.” 해릿은 몸을 일으켰지만, 어쩔 수 없이 찍찍이의 어깨에 기대야 했다. 찍찍이는 해릿의 망치를 들고 천천히 중앙 성채 쪽으로 다가갔다.
“얼른 댁네 기사를 찾아서—" 해릿이 말하다 말고 고개를 내저으며 웅크렸다. 정원 벽에 매달린 악마의 눈에 뜨인 것이었다.
찍찍이는 대전당 문 아래의 어두컴컴한 굴로 해릿을 밀쳤다.
후회는 날래게도 벽에서 뛰어내렸다. 이제 사지를 쓰는 법에도 능숙해진 것 같았다. 놈은 몸을 낮게 숙이고는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령의 쉼터 쪽에 뭔가 놈의 이목을 끄는 게 있었다. 놈은 두 방향을 두고 잠깐 고민하더니 주점 쪽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찍찍이는 머리를 푹 숙여 숨었다.
“모리스!” 서덜랜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반갑게 나타나 줬네요!”
서덜랜드는 원형 방에서 중앙 안뜰로 달려 나가서 익숙한 사람을 맞이했다. “발 어쩌고” 하는 대도시 여러 곳에서 활약하는 납품업자. 모리스는 심문회의 병참 장교로 근무하며 연결망을 구축해 남부 테다스에 무장을 공급했다. 고된 일에 시달린 탓인지 이제는 겨자색 머리칼 사이에 드문드문 백발이 섞여 있었지만, 날씬한 몸매에는 “부티”가 흘렀다. 모리스는 접경지대에 빈번히 출장을 다니고는 했다. 그 탓에 이번 일에도 휘말린 게 후회스럽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사람 인생에 활기를 불어넣는 재주가 있군요.” 모리스가 말했다. “그러다 명줄 다 깎아 먹힐 것 같기는 해도.”
“상황이 좋지는 않아요.” 서덜랜드가 말했다. “그래도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끝나다니? 난 어떻게 시작하면 되는지조차 모르겠는데요.” 모리스가 자기 손수레를 쳐다보며 말했다. 돕고 싶기는 했지만, 이번 출장은 교역 때문이었지 사냥대에 물자를 보급하러 나선 게 아니었으니까.
서덜랜드가 고맙다는 듯이 모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몸을 돌려 휘파람을 불었다. 보스, 셰이드, 다그나가 그 소리에 모여들었다.
“내가 바로잡을게.” 서덜랜드가 말했다. “놈이 볼 수 없는 곳에 진을 쳐야 해. 불시에 공격을 퍼붓는 거야.”
“그걸로는 부족해.” 보스가 말했다. “이 괴물은—” 보스의 말은 안뜰 서쪽에서 들려온 굉음에 끊겼다. 찍찍이와 해릿이 대전당으로 향하는 경사로 아래에서 절뚝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놈이 주점에 있어요.” 찍찍이가 헐떡이며 말했다.
“주점이라고?” 모리스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창조주 맙소사.”
전령의 쉼터 주점은 처음으로 자유를 맞는 이들도, 그리고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이들도 두루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곳에서는 마음에 의심을 품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어느 남자가 그러도록 확실히 해 두었으니까. 그는 국경 인근에 자신만의 여관을 차리기 위해 떠난 참이었다.
후회가 주점의 문을 박살 내 뚫고 들이닥쳤다. 뭔가 움직이는 게 있었다. 이내 놈은 수수하게 차려입은 드워프 한 사람을 발견했다. 머리는 벗겨졌고, 턱수염은 짧게 친 반면 콧수염은 멋들어지게 기른 모습이었다. 그자는 차분하게 바를 닦고 있었다.
악마가 가까이 다가갔다. 후회의 실낱이 그득했다. 놈은 잠시 멈추고 제 먹잇감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비계급층 놈.” 후회가 입을 열었다. “지난날에 잘못한 게 많기도 하구나.”
“집어치워.” 전령의 쉼터의 옛 주인장, 캐봇이 말했다. 캐봇은 마치 건배를 제안하듯 병을 들어 올리고는, 그 주둥이에 행주를 쑤셔넣었다. “내가 술집 주인이다. 내가 말아주는 술이면 후회 같은 건 싹 씻겨 내려가.”
캐봇은 촛불로 행주에 불을 붙이고는 악마에게 즉석 화염병을 내던졌다. 병은 놈의 발치에 떨어졌지만, 악마는 가볍게 움직여 불길을 피해 버렸다. 놈은 웃음을 짓고는 팔을 휘두르려 했지만, 허리를 단단히 졸라맨 옷차림을 한 엘프 하나가 계단 뒤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멈칫하고 말았다. 기다란 갈색 머리칼을 꽉 묶어 틀어 올린 엘프는 침착하고도 냉정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곧 손톱으로 작은 주머니 하나를 끌렀다. 안에는 반짝이는 은색 가루가 가득했다.
“조심하라고.” 캐봇이 심문회의 전임 약제사, 엘란 베말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엘란은 네가 뭔지 잘 알지만, 촉매 역할만 할 뿐이니까.”
엘란이 주머니에 든 것을 화염 위로 살포시 흩뿌리자, 캐봇은 바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화염을 만난 가루는 불똥을 튀기며 후회를 불태워 놈의 얼굴을 하얀 재로 뒤덮었다. 표면이 갈라지고 회반죽 일부가 유약이라도 바른 듯 구워지자 놈은 괴성을 질렀다. 겉에만 살짝 피해를 준 수준이었지만, 앞을 볼 수 없게 된 놈은 격노에 사로잡혔다.
엘란은 몸부림치는 괴수를 빙 둘러 캐봇과 함께 문으로 달려 나갔다.
“언제나처럼 아름답군, 내 사랑.” 캐봇이 말했다.
“주책은!” 엘란이 자기 방식대로 대꾸했다. 캐봇은 그게 좋았다.
후회의 비명이 온 하늘보루를 뒤흔들었다. 아래 안뜰에서 계획에 난항을 겪던 서덜랜드 일행에게는 그 소리가 특히나 거슬렸다.
“놈이 단단히 꼭지가 돌아서는 튀어나올 거야.” 서덜랜드가 말했다.
“괜히 힘을 불려 주지 마.” 셰이드가 말했다. “우릴 조종해 싸우게 할 거라고.”
“우리, 놈에게 피해를 주긴 했나요?” 다그나가 물었다.
“놈은 후회예요.” 보스가 말했다. “사람의 의심을 찾아 그로부터 힘을 얻죠.”
“우릴 찾아낸다고요? 어둠피조물처럼요?” 찍찍이가 말했다. 그 괴물을 도발한 게 후회스러웠다. 악마는 계속해서 주점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바로 그런 거!” 보스가 지적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마!”
찍찍이는 민망해하며 대신에 갓 구운 빵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놈에게 손상을 주긴 했는데.” 서덜랜드가 말했다. “프레스코화 근처에서 말이야. 놈을 꿰뚫은 상처는 그대로 남았거든.”
“너는 네 선택으로 하늘보루에 왔으니까.” 보스가 말했다. “놈은 네가 절대 의심하지 않는 단 하나를 공격한 거지.”
“하지만 우리는 너를 따라온 거잖아.” 셰이드가 말했다. “그건 경우가 달라.”
서덜랜드는 일행의 말소리를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요새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자기 삶이 완전히 뒤바뀐 게 이곳이기는 하지만, 하늘보루가 서덜랜드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 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서덜랜드는 주방에나 틀어박혀 있었을 것이다. 자기 잠재력을 믿고 기회를 준 건 심문관이었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심문관은 자신을, 친구 모두를 위해서 버티고 서준 존재였다. 자신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게 해 준 사람이었다. 모두가 앞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었다.
서덜랜드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그야 당연히 하늘보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 서덜랜드가 사람들을 데려오긴 했지만, 일행에게 진취적인 영감을 주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서덜랜드는 줄곧 뒤를 돌아보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생각했다. 말싸움을 벌이는 친구들을 바라보자, 이들을 실망하게 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느껴본 감정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그리고 그때, 서덜랜드는 가능성을 보았다.
“셰이드!” 서덜랜드가 갑자기 대성을 지르는 바람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놈이 너한테는 뭘 보여줬지?”
“뭐라고?”
“후회 말이야.” 서덜랜드가 말했다. “네가 공격하려던 참에, 놈이 너한테 뭘 보게 했어?”
셰이드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나 나빴어?” 서덜랜드가 말했다.
“최악이었어. 내게는 최악이었다고.”
보스와 찍찍이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덜랜드는 하늘보루를 둘러보았다. 후회가 울부짖고 있었다. 결국에는 모두의 힘을 빼놓고 일행을 하나하나 쓰러뜨릴 것이었다. 서덜랜드는 이길 수 있단 것을 보여줘야 했다.
“좋았어.” 서덜랜드가 말했다. “빠르게 회복하긴 하지만, 그래도 놈에게 피해를 줄 수는 있어. 단지 강한 일격을 가해야 할 뿐이야. 다들 날 믿어?” 서덜랜드는 친구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모두 날 믿어주겠어?”
돌아보는 친구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하러 그런 걸 물어봐. 당연히 믿지. 하고 말하는 듯이. 서덜랜드에게 경례를 올려붙인 찍찍이만 빼고.
“그래.” 서덜랜드가 말했다. “너희가 필요해. 놈을 내게로 유인해 줘야 하거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힘을 합쳐 줘. 내가 너희를 위해 버티고 설 테니까.”
마침 캐봇과 엘란이 안뜰 서쪽의 가장자리에서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악마를 죽일 건가?” 캐봇이 물었다.
“도움을 좀 받아서요.” 서덜랜드가 말했다. “그 자식 성깔을 돋울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있고말고요.” 엘란이 말했다.
“좋아요.” 서덜랜드가 답하고는 찍찍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놈의 주의를 끌어. 마구간까지 데리고 오는 거야.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냅다 뛰기만 해.”
“그 녀석은 절 안 좋아하는데요.” 찍찍이가 기죽은 듯이 말했다.
“네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뛰어.” 서덜랜드가 찍찍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날 믿고.”
찍찍이는 여전히 자기 손에 들려 있는 해릿의 망치를 보았다. 그러고는 도움닫기를 세 번 정도 하는가 싶더니, 곧장 경사로 밑을 향해 달려 나갔다.
서덜랜드는 캐봇과 엘란을 향해 손짓했다. “녀석이 제 종자한테 손대지 못하게 해 주세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곤 종종걸음을 치며 이동했다.
“비전 장인님.” 보스가 말했다. “관문에 갈 건데 같이 가시겠어요?”
“연구할 만한 파편 조금만 남겨 줘요.” 다그나가 보스를 뒤쫓아 가는 사이, 일행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다리를 살짝 저는데.” 해릿이 말했다. “그렇지만 날랜 수레가 있다면야…”
“쓸 수 있는 건 뭐든 써야죠.” 모리스가 초조해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덜랜드는 친구들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본 다음 검을 준비했다. 셰이드가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어디로 가?” 셰이드가 물었다.
“마구간 쪽으로 가 줘.” 서덜랜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날 지켜볼 수 있는 자리로.”
셰이드는 서덜랜드의 어깨를 힘주어 붙들고는,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돌려세웠다. 셰이드가 눈을 크게 떴다. “놈을 너한테 끌어들일 셈이구나.”
“기회에 걸어보는 거야.” 서덜랜드가 셰이드의 손을 쥐며 말했다. “모두를 위해 나서 보는 거고.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이내 서덜랜드는 쥐었던 셰이드의 손을 그 허리춤에, 단검의 칼자루가 있는 곳에 놓았다. “내가 친구들을 해치는 일 없게 해 줘.”
“역부족이야.” 셰이드가 말했다. “혼자서는 안 돼.”
서덜랜드는 웃음을 짓고, 셰이드의 뺨에 회반죽 가루가 묻어 남은 얼룩을 쓸어 지웠다. “혼자가 아니야.” 서덜랜드가 말했다. 위쪽 안뜰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오자, 서덜랜드는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마구간 쪽으로 향했다. “우린 이번 일의 대응책이잖아. 그러니까 응답하는 거야.”
후회가 주점 문을 박차고 흘러나왔다. 햇볕을 받자 다시 만들어낸 눈을 깜빡였다. 놈은 먹잇감을 찾았다. 제 몸을 치유하려면 의심을 먹어야 했다.
놈은 찍찍이를 찾아냈다. 찍찍이는 안뜰 중간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나 도망칠 거다.” 찍찍이가 말했다. 해릿의 망치를 꼭 쥔 채로.
“조그만 것아.” 후회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놈의 몸뚱이 왼쪽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놈은 구태여 피하려 들지도 않았다. 캐봇은 나무통 뒤에 반쯤 몸을 숨기고 있었으나, 악마가 캐봇의 존재와 본질을 알게 된 이상 기습 효과는 낼 수 없었다. 놈이 팔을 길게 뻗자 캐봇이 힘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엘란은 주머니를 준비했지만, 또 다른 팔이 엘란 또한 멎게 하고 말았다. 무수히 많은 눈이 거슬린다는 듯 찍찍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 도망칠 거라고!” 찍찍이가 몸을 떨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좋군.” 후회가 대답하고는 달려들었다.
찍찍이는 옆으로 굴러 머리를 숙였다. 악마는 어리둥절한 채로 내려앉았다. 놈은 몸을 돌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형상을 바꿔 머리를 뒤로 향하게 했을 뿐. 그러고는 찍찍이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가지고 놀 생각으로, 부러뜨릴 생각으로.
찍찍이는 주점을 지나쳐 남쪽 벽으로 달려갔다. 작은 계단을 종종거려 내려갔지만 곧 안뜰 중앙에 노출되고 말았다. 돌이 옥죄이듯 다가와 주변이 점점 지하 가도처럼 변해 갔다. 하지만 찍찍이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시는 기사님이 달리라고 하셨으니 그대로 달릴 뿐이었다.
후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기색을 비쳤다가, 이내 낮게 울음소리를 냈다. 저걸 갖고 노는 게 잠깐 즐겁기는 했지만, 이건 예상 밖이었다. 놈이 주의를 집중하자 찍찍이가 느려졌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게 더는 재미있지 않았다. 그래서 놈은 찍찍이의 뒤로 훌쩍 뛰어나갔다. 찍찍이의 친구들이 도사리고 있는 곳 한복판으로.
관문의 보스는 얼음덩어리를 내던졌다. 지팡이에서 냉기의 힘이 파지직거렸다. 땅 곳곳이 물로 젖어 번들거렸고, 다그나는 거기에 룬을 던져 전류가 흐르게 했다. 찍찍이는 그걸 이리저리 잘도 피해 달아났지만, 악마는 수많은 다리를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찌릿한 충격이 몸에 전해지자, 놈은 분노에 사로잡혀 보스와 다그나 쪽으로 향하려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또 반대 방향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모리스가 모는 손수레에 올라탄 해릿이 온갖 물건들을 던져 댔다. 전기 충격과 잡동사니 세례가 계속 이어졌다. 캐봇과 엘란도 가세해 난리를 피웠다. 찍찍이는 멈추지 않았다. 온통 정신없고 시끄러운 것 천지였다.
후회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서덜랜드는 마구간에 있었다. 손가락으로 관리인의 시신이 있었던 울타리를 훑으며 혈흔을 짚어 보았다. 서덜랜드는 심문관을 생각했다.
“심문관님은 저희를 위해 버티고 서 주셨어요.” 나지막이 말했다.
초조해진 셰이드가 근처의 계단에서 부산히 움직였다. 주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서덜랜드는 거기서 삶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은 거기서 삶을 끝내게 될지도 몰랐다. 그 생각에 서덜랜드는 미소지은 다음, 돌아서서 하늘보루를 한눈에 담아보았다.
“심문관님과 꼭 닮은 곳이에요.” 서덜랜드는 혼잣말한 다음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의도를 갖고서. 전령의 쉼터에 불길이 치솟는 게 보였다. 안뜰 두 곳 모두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악마가 친구들 모두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심지어는 다그나마저 웃음기를 잃고 말았다. 다 서덜랜드가 일행을 여기로 데려온 탓이었다.
서덜랜드는 걸음을 멈추고 검을 바로 세워 들었다. 도신의 평평한 부분에 이마를 갖다 댄 채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난 후회해!” 고함을 질렀다. 있는 힘껏, 살면서 낸 목소리 중 가장 큰 소리로.
악마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용이면서 갯과 짐승 같기도 한 귀를 씰룩였다. 놈은 일곱 갈래 방향의 필멸자 모두를 멎게 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화가 치밀고 격분이 일었다. 그렇지만 서덜랜드의 호명은 마치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등대 같았다.
“혼자서 행동한 걸 후회해!” 서덜랜드가 계속 고함쳤다.
후회는 젊은 전사를 향했다. 머리에 달린 수많은 눈이 번득이며 모두 서덜랜드를 주목했다. 그전까지는 만질 수가 없었는데! 놈은 일행의 목숨을 차례대로 앗을 수도 있었지만, 이 새로운 감각이 너무나 유혹적이고 익숙해서 도무지 물리칠 수가 없었다! 마치 서덜랜드가 자신을 처음 하늘보루에 끌어들인 후회의 메아리를 되받아 퍼뜨리는 듯했다. 놈의 팔에 갈퀴 발톱이 더 자라났다.
“내 친구들을 이용한 걸 후회해!” 서덜랜드의 고함이 이어졌다.
악마는 마치 재채기라도 하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움찔댔다. 꼭 매캐한 향신료를 가득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러고는 서덜랜드의 친구들을 제치고, 찍찍이를 무시하고 지나쳐 서덜랜드에게 달려갔다. 활짝 열어젖힌 서덜랜드의 정신에 순식간에 다가가 손을 집어넣었다. 그로부터 자신이 쓸 수 있는, 자신을 존재케 하는 의심을 뽑아 꺼냈다. 멍청한 놈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구나! 필멸자들은 너무나 증오스럽고 가련했다!
후회는 가시덤불 같은 이빨과 갈퀴 발톱을 드러내고 먹잇감에 달려들었다.
서덜랜드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무력해 보였다. 그런데 돌연, 서덜랜드는 자신이 가장 크게 후회한 순간에 사로잡혔다. 친구들이 말해준 그대로였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에 의심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서덜랜드는 하늘보루와 고통받는 친구들,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
“이제는 후회해!” 서덜랜드가 소리쳤다.
서덜랜드는 검을 비틀어 날을 세웠다. 발을 뒤로 한 걸음 빼서 균형을 잡고, 어깨로 무기를 단단히 떠받든 채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후회를 받아들였다.
후회는 서덜랜드가 저항하리라 예상했다. 누군가 자신을 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오롯이 인정하지 않았다. 도약하며 달려들었는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제가 낸 속도에 되레 자기가 버둥거렸다. 놈은 아가리부터 칼날에 찢겨, 몸통이 양분되고 사지가 절단되었다. 괴수는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서덜랜드는 삽시간에 살아 움직이는 회반죽에 뒤덮였다. 그 잠깐 서덜랜드는 자신이 하늘보루에서 보낸 시간을 가장 희한한 방식으로 돌이켜 보았다. 프레스코화의 파편이 눈앞에 흩날렸고, 그림을 더럽힌 악마는 두 토막으로 갈라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검이 짐승의 심장에 박혀 버린 탓에 서덜랜드는 뒤로 밀려났다. 놈은 목가리개와 어깨 갑옷 사이의 틈새를 찾아 서덜랜드의 어깨를 베었다. 서덜랜드는 무릎을 꿇었다. 후회의 무게가 자신을 짓눌렀다. 그래도 서덜랜드는 계속 나아갔다. 친구들을 위해 일어섰다. 바닥에 쓰러졌더라도 그들을 위해 버티고 설 것이었다.
“심문관님처럼.”
서덜랜드에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서덜랜드는 뒤로 넘어가 나동그라졌다. 그러고는 모든 게 잠잠해졌다.
서덜랜드는 눈을 깜빡였다.
서덜랜드는 바닥에 등을 대고 쓰러져 있었다. 머리 위 하늘은 파랗고 맑았다. 흉벽에 걸린 깃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기는 여전했다. 서덜랜드의 머리와 가슴이 요동쳤다. 실패한 걸까? 후회가 재생하는 바람에 그 검격도 소용이 없게 됐을까? 서덜랜드는 놈을 한 번 더 공격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서덜랜드는 한 손을 짚고 벌떡 일어나 뒤를 살폈다.
악마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양단되지 못한 탓에 몸뚱이의 3할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팔다리 몇 개는 없어진 데다 더 만들어내는 것도 어려운 듯했다. 놈은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먹어 치울 만한 의심을 찾고 있었다.
놈은 서덜랜드 부대를 발견했고, 허기를 드러냈다.
셰이드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달려들었다. 낮게 굴러 놈의 갈퀴 발톱을 피한 다음, 왼쪽 단검으로 자상을 내고 오른쪽 단검으로 한층 더 깊게 베었다. 셰이드의 단검에는 무엇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는 게 현명한 액체가 적셔져 있어, 후회에게 격렬한 화학 화상을 남겼다. 보스는 엘프어로 욕을 내뱉고는 시전하는 것을 느끼기만 해도 뼈저리게 아픈 주문을 구사했다. 악마의 표면이 물결치며 갈라져 고통을 안겼다. 찍찍이는 그 사이로 뛰어들어 해릿의 망치를 휘둘렀고, 놈의 발 부분을 형형색색의 얼룩으로 뭉개 버렸다. 모두가 나서서 베고 주문을 외고 박살 냈고, 괴물은 더는 회복하지 못했다.
서덜랜드는 심문관에게 합류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대에 합류한 친구들에게는 마침 그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해 준 참이었다.
악마는 맹공격을 피해 뒤로 허물어지듯 물러났다. 놈은 원형 방으로 가려 했다. 다시 잠든 뒤에 강해져서 돌아올 것이었다. 이건 다 저놈들의 잘못이었다. 다음번에는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알려줄 것이었다. 자신을 하늘보루에 이끌리게 한 후회는 쉬이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놈은 화염과 룬, 반쯤 채워진 손수레로 된 장벽을 맞닥뜨리고 멈추었다. 다그나와 다른 일행이 퇴로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고, 보잘것없는 자들인데도. 하지만 그들은 한때 누군가의 마음에 이끌려 하늘보루의 심장이 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후회에게는 가망이 없었다. 놈이 포식하던 의심은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것은 몸부림치고 헐떡였고, 그 다리는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곧 놈은 관문 옆의 땅에 쓰러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서덜랜드가 떨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내가 뭐 놓친 건 없지?”
말을 마친 서덜랜드가 휘청였다.
순식간에 도움을 주려는 이들이 서덜랜드를 어깨로 떠받치고 섰다. 안도하며 악수를 나누고 등을 한 번 짝 소리 나게 쳐 주기도 했다. 모두가 환호했다.
셰이드만 빼고. 셰이드는 단검을 든 채로, 여전히 격렬한 싸움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듯 서 있었다. 셰이드는 손으로 코를 쓸어 넘기고 훌쩍였다.
서덜랜드는 차라리 다시 후회의 악마를 맞닥뜨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셰이드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셰이드가 몸을 세차게 날려 품에 안기는 바람에, 서덜랜드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서덜랜드는 어깨의 베인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고 셰이드를 최대한 힘주어 안았다. 소란스러운 분위기도 잦아들자, 서덜랜드는 하늘보루에 드리운 암울한 분위기가, 그 한기와 적막함이 걷히는 걸 느꼈다. 스스로 맹세한 대로, 서덜랜드는 과연 뭔가를 더 해냈다. 자신이 약속한 게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 시간이 다소 걸렸을 뿐이었다.
일행은 모두 후회를 돌아보았다.
놈의 토막 난 사지는 이제 기이한 마른 회반죽 무더기로 변해 버린 뒤였다. 본래 프레스코화의 세밀한 그림을 가늠할 만큼 큰 파편이 남기도 했다. 신중하게 짜맞추기만 한다면 벽에 다시 붙여 복원할 수도 있을 터였지만, 다들 당장은 그런 생각이 안중에도 없었다.
괴물의 핵을 이루던 부위가 그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놈의 수많은 눈은 어딜 봐야 하는지를 모르는 듯이 번득였다. 시간만 충분하다면야 재생할 수 있겠지만,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조금만 공격해도 놈의 정신과 의지는 장막 너머로 건너갈 것이었다. 아주 잠깐, 햇빛이 비치자 놈 안의 무언가가 빛을 발했다. 악마로 뒤틀리기 전에 존재했던 영의 실낱이 남은 것이었다. 후회의 대극에 선 감정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성격이 살짝 다른,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성찰”과 “반성”. 처음에는 어떤 행동의 잔향에 이끌려 넘어온 존재였을 것이다. 스스로 용납할 수 없던 생각에서 비롯된 그것은, 지금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 하고 속삭였다.
서덜랜드가 절뚝이며 영의 잔재에 다가갔다. 보스, 셰이드와 찍찍이도 그랬다. 다그나는 실험에 쓸 소재를 수집하느라 바빴다. 해릿은 앞으로 가자고 재촉했지만, 모리스 경은 손수레를 은근슬쩍 멀리 두었다. 캐봇과 엘란은 바 테이블 뒤에서 그리운 옛날을 추억했다.
“조용히 사라져라, 영이여.” 보스가 어떠한 사감 없이 말하고는, 배낭에서 작은 칼날을 꺼내 악마의 몸뚱이 한쪽을 찔러 붙박아 두었다.
셰이드는 침을 퉤 뱉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검 하나를 집어 들고, 괴물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칼날을 박아 넣을 뿐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런 말은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을 것이었지만.
서덜랜드는 머뭇거렸다. 후회란 계속 남아 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놈이 그대로 드러누워 있게 둘 수는 없었다. 잠깐이나마 서덜랜드는 농장을, 아버지를,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떠나온 그날을 생각했다. 악마가 마음을 휘저었다.
“역시 언젠가는 만난 적이 있단 걸 알았지.” 후회가 말했다.
“네가 지금 맛보는 그 실수는 내 것이 아니야.” 서덜랜드가 옛 상념을 떨치며 말했다. “그건 네가 저지른 거지.” 서덜랜드는 검의 코등이에 기대어 칼날을 밀어 넣었다.
악마는 킥 웃었고, 이내 그 몸뚱이는 납작해지기 시작했다. 겹겹의 회반죽이 힘을 잃고 처졌다. 힘 빠진 소리로 “맛있어.” 한 마디를 남기고는, 곧 장막 너머 영의 세계를, 아스라이 반짝이는 불빛을 보았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것은 처음 자신이 여기 이끌린 이유보다도 밝게 빛났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찍찍이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치켜들었다. 서덜랜드는 자기 종자를, 부대원들을,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방향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젠가 그분이 자신에게 알려주신 것처럼. 하늘보루에는 후회가 내렸지만, 이들 모두가 서덜랜드의 대응책으로 나섰다.
서덜랜드는 찍찍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찍찍이는 망치를 높이 든 다음, 악마를 향해 내리쳤다. 정원에는 나른한 바람이 불었다.
가장 숭고하신 빅토리아 교황 성하의 칙령으로,
그간 봉사한 이들에게 찬사를.
이제 전령도 더는 그대들을 이끌지 않고,
대군도 명성도 역사 속으로 물러나나,
그대들 봉사가 선하고 참되었음을 알기를.
심문회에, 그리고 심문회에 의해 변화가 도래하매
우리는 받아들이고 나아갈 힘 있는 복된 이들이며,
그로써 공포와 후회는 뒤로할 수 있나니.
하늘보루가 의연함을, 그 불꽃이 환히 타오름을 알기를.
그곳은 언제나 그대들 근원이나, 거기 얽매이지는 않기를.
또다시 그곳에 발걸음하는 일 없기를.
과거가 그대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기를.
그리고 부디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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